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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l 12. 2024

41. 나는 한발 더 내디뎌 보기로 했다.

콜롬비아 | 인생그래프,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서 3

나는 더 이상 여행을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했다.

여기는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의 국경마을 이피알레스.

다시 콜롬비아의 보고타로 돌아가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편을 알아보는 것과,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로 넘어가서 비행기 편을 알아보는 것.

두 가지 정도가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콜롬비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국경을 넘어 키토로 가자니 그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이상으로 무언갈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이라도 있었으면, 적어도 항공티켓이라도 알아봤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다시 생각이 멈추었다.


생각이 멈추니 이번에는 외로움과 고독함이 밀려왔다.

거스를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함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외로웠던 적도, 고독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만큼 외롭고 고독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나만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고독과 외로움은 세상과의 단절감으로 바뀌었다.

나는 분명 모두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데.


나만 다른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없이 깊은 심연의 세계로 가라앉던 내 마음을 붙잡아 준 것은 주마등처럼 떠오르던 지난 날들 중 한 장면이었다.


바로 짐을 싸던 그 순간.


어디 쓸 곳이나 있겠냐 싶다가도 혹시나 싶어 챙겨뒀던 내 옛날 스마트폰. (aka. 갤럭시S)

그리고 그것을 귀중품을 넣어 다닌 가방이 아닌 옷들과 함께 넣어 두었던 그날의 기억.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칠 때보다도 더 격렬하게 자리에서 뛰어올라,

연가시에 감염되어 물가에 물을 찾는 어떤 영화의 사람들처럼 배낭을 뒤졌다.

그리고 찾아낸 작고 오래된 스마트폰 하나.


다행히 폰 충전기는 가지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스마트폰에 충전기를 꽂았고, 곧이어 핸드폰이 켜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 이 순간 켜진 핸드폰으로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가장 먼저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그 당시엔 페이스북이 SNS 중에선 가장 주류였다.)


그곳에는 내 친구들의 평온한 일상이 있었다.

나는 나를 아는 이 하나 없고 내가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이국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 호텔방에 홀로 앉아서 겁에 질려있는데, 인터넷 속 내 친구들은 어제와 같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신기한 건,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친구들의 피드를 보고 샘이 나거나 부러운 마음이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내가 함께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평온한 일상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내가 살던 세상과 단절된 듯한 나의 마음을 다시 그들과 같은 세상으로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외로움과 고독함이 만들어낸 단절감이 사라지자 바스러졌던 멘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조금 더 현실을 직시하고, 오늘을 그리고 지금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나를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 남아메리카에서, 막 죽다 살아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강제로 실천하는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구나라는 것을.

더 이상 추락할 곳도, 더 추락할 일도 앞으로는 없겠구나-라는 것을.

너무나도 안전한 한국이, 따뜻한 우리 집이 그립던 그 순간 내가 깨달은 건,


'더 이상 추락할 일 없는 내 인생 가장 밑바닥에 있다는 처참한 현실과 좌절'이 아니라

'이젠 무슨 일을 하던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기대와 희망이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다가온 죽다 살아난 경험이,

내가 봐야 할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닌 '오늘,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기 시작한 것이.

(그래서 나는 오늘만 산다. 내일은 없음 ㅎ)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내일이다.'라는 누군가의 유명한 말처럼,

나는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남의 눈치를 보고, 주변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내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결코 남에게 폐를 끼치진 않도록.)


키토에서 한국으로 갈까

보고타에서 한국으로 갈까

두 개의 선택지에 새로운 선택지가 늘어났다.

'여행을 계속해보자.'라는 선택지.



나는 한발 더 내디뎌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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