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도 아프다. 이해해도 무너진다. 지식은 고통의 면제부가 아니다."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은 일반인보다 높다.
미국 정신의학회의 통계에 따르면, 의사 직군 중 정신과 의사의 자살률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마음은 치료하지 못한다. 역설이다. 잔인한 역설.
심리상담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상담을 마치고 퇴근한 뒤, 자신도 상담받으러 간다는 것. 내담자의 고통을 온종일 들으며 공감한 사람이, 밤에는 자신의 고통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는다.
자기 계발서를 쓰는 작가도 새벽 3시에 불안에 잠 못 이룬다.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는 명상 지도자도 우울증 약을 먹는다. 긍정심리학을 연구하는 교수도 번아웃으로 휴직한다.
왜 그런가.
왜 아는 사람도 아픈가.
뇌는 단일한 기관이 아니다.
신경과학자 폴 맥클린은 1960년대에 "삼중뇌 이론"을 제안했다. 인간의 뇌는 진화 과정에서 세 개의 층이 쌓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장 안쪽에는 파충류의 뇌, 그 위에 포유류의 뇌, 가장 바깥에 영장류의 뇌.
파충류의 뇌는 생존을 담당한다. 심장 박동, 호흡, 체온 조절.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는 반응.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하다.
포유류의 뇌는 감정을 담당한다. 편도체와 해마가 여기에 있다. 두려움, 분노, 슬픔, 기쁨. 애착과 유대. 기억과 학습.
영장류의 뇌는 사고를 담당한다. 전두엽이 여기에 있다. 논리, 분석, 계획, 판단. 언어와 추상화. 자기 인식과 메타인지.
문제는 이 세 개의 뇌가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이다.
전두엽이 "이건 비합리적인 불안이야, 통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0.01%도 안 돼"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편도체는 듣지 않는다. 편도체는 숫자를 모른다. 확률을 모른다. 논리를 모른다. 편도체가 아는 것은 단 하나, "위험하다" 또는 "안전하다"뿐이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통계를 읽었고, 논문을 봤고, 전문가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도 비행기를 탈 때 손에 땀이 난다. 심장이 빨라진다. 전두엽이 아무리 "괜찮아"라고 외쳐도, 편도체는 이미 경보를 울린 뒤다.
조지프 르두, 뉴욕대학교 신경과학 교수는 이것을 "저위로(low road)"와 "고위로(high road)"라고 설명했다. 감각 정보가 뇌에 들어오면 두 가지 경로로 처리된다. 저위로는 편도체로 직행한다. 빠르고,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이다. 고위로는 전두엽을 거쳐간다. 느리고, 의식적이고, 분석적이다.
위험 신호가 감지되면 저 위로가 먼저 반응한다. 전두엽이 "이거 진짜 위험한가?" 하고 분석하기도 전에, 편도체는 이미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고 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반응하지?" 하고 의아해하는 순간에도 몸은 이미 공포 반응 중이다.
아는 것이 소용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식은 전두엽에 저장된다. 하지만 고통은 편도체에서 시작된다. 두 영역은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속도로 작동하지 않는다. 편도체가 0.02초 만에 반응할 때, 전두엽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편도체는 학습한다. 그것도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한 번 물린 개는 오래 기억된다. 한 번 배신당한 관계는 오래 의심된다. 한 번 창피당한 상황은 오래 피하게 된다. 편도체는 생존에 위협이 되었던 경험을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편도체가 "소거 학습"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전두엽은 새로운 정보를 학습하면 기존 믿음을 수정한다. "아,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 상황은 위험하지 않았구나." 하지만 편도체는 그렇지 않다. 한 번 학습된 공포 반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억제될 뿐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이것을 "공포 소거의 맥락 의존성"이라고 부른다. 상담실에서 "그건 과거의 일이야, 이제 안전해"라고 아무리 학습해도, 비슷한 상황에 다시 놓이면 공포 반응이 되살아난다. 새로운 학습이 옛 학습을 덮어쓴 게 아니라, 그 위에 얹혔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치료"되지 않는다. "관리"될 뿐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 보스턴대학교 정신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트라우마는 이야기로 저장되지 않는다. 신체 감각으로 저장된다." 그의 책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몸은 기억한다(The Body Keeps the Score)."
머리로는 잊어도 몸은 기억한다. 비슷한 냄새, 비슷한 소리, 비슷한 촉감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심장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고, 호흡이 가빠진다. 전두엽이 "지금은 안전해"라고 아무리 말해도, 몸은 이미 20년 전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다.
철학자들도 이 문제를 알았다.
스피노자는 17세기에 이미 말했다. "감정은 그 감정보다 더 강한 반대 감정에 의해서만 억제될 수 있다."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감정은 감정으로만 다스릴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은 더 직접적으로 말했다.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오직 그래야만 한다." 우리는 이성이 감정을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감정이 이성을 부린다. 우리가 "합리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도 대부분 감정적 결정을 사후에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현대 신경과학은 흄의 직관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신경과학 교수는 "소마틱 마커 가설"을 제안했다. 우리의 의사결정은 순수한 논리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선택지에는 신체적 감각(somatic marker)이 붙어 있다. 좋은 느낌 또는 나쁜 느낌. 우리는 이 느낌을 바탕으로 결정한다. 논리는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생각해"라는 조언이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느끼고, 그 느낌을 논리로 포장하도록 설계되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문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빙산에 비유했다. 수면 위로 보이는 것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수면 아래, 무의식 속에 잠겨 있다.
현대 인지과학은 프로이트의 비유가 과소평가였음을 밝혀냈다. 의식의 비율은 10%가 아니라 5%도 안 된다. 어떤 연구자들은 1% 이하라고 추정한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의식적 자아는 거대한 무의식적 처리 과정의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보고 있다.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했지?"
"나는 왜 이 사람에게 끌리지?"
"나는 왜 이 상황이 두렵지?"
이런 질문에 우리가 내놓는 대답은 대부분 지어낸 것이다. 진짜 이유는 무의식 속에 있고, 의식은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사후 합리화(confabulation)"라고 부른다.
자기 이해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나를 알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은 틀렸다. 왜냐하면 "나"의 대부분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 분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영역. 그곳에 고통의 뿌리가 있다.
융은 이것을 "그림자(shadow)"라고 불렀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 의식에서 추방한 부분, 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부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억압될수록 더 강해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표면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면 심리학은 왜 배우는가?"
"상담은 왜 받는가?"
"자기 이해는 왜 추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심리학은 고통을 없애주지 않는다.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다. 심리학은 고통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빅터 프랭클,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고통은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가 말한 것은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고통과 의미가 없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포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공포는 다르다.
"뭔지 모르겠지만 무서워"와 "이건 공황발작이야, 20분이면 지나가"는 같은 공포가 아니다. 둘 다 심장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지지만, 후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 정체를 알기 때문이다. 지도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방패가 아니다. 고통을 막아주지 못한다.
하지만 지식은 지도가 된다. 어디쯤 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지식은 등불이 된다. 어둠 속에서 한 발짝 앞을 비춰준다.
체화의 문제가 남아 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것은 다르다. 심리학 용어로는 "명시적 지식(explicit knowledge)"과 "암묵적 지식(implicit knowledge)"이라고 부른다.
명시적 지식은 책으로 배울 수 있다. "불안할 때는 호흡을 천천히 하면 좋다." 이것은 명시적 지식이다. 읽으면 된다.
암묵적 지식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실제로 불안할 때, 그 순간에 호흡을 천천히 하는 것. 이것은 암묵적 지식이다. 수백 번 연습해야 몸에 밴다.
수영 이론을 완벽하게 알아도 물에 빠지면 허우적댄다. 머리가 아는 것을 몸이 알기까지는 수천 번의 반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도 무너지는 것이다. 이론은 알지만 체화는 아직 안 됐기 때문이다.
체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지름길이 없다.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시도하는 과정. 그 과정을 충분히 거치면 어느 순간 몸이 알게 된다. 위기의 순간에도 자동으로 작동하는 앎. 생각하지 않아도 튀어나오는 반응.
그것이 진짜 배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책 한 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역설적인 진실 하나를 말해야겠다.
사람은 완벽할 때보다 망가졌을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새 스마트폰을 생각해 보라. 박스를 열고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조심스러운가. 케이스를 씌우고, 보호필름을 붙이고,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봐 늘 긴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린다. 화면에 스크래치가 생긴다. 모서리가 찌그러진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히려 편해지는 것이다. "이제 됐다." 더 이상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다. 망가진 폰이 오히려 자유를 준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하던 관계가 있다. 하지만 어느 날 크게 싸운다. 감춰왔던 말들이 터져 나온다.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 싸움 이후, 관계가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완벽한 관계라는 환상이 깨지면서, 진짜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은 완전히 망했다."
이 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 더 이상 망하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미 망했으니까. 바닥을 쳤으니 더 내려갈 곳이 없다. 그 바닥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이것을 "자기 수용(self-acceptance)"이라고 불렀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완벽한 자신이 아니라, 결점이 있고 상처가 있고 망가진 부분이 있는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로저스는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변화할 수 있다."
변화하려고 발버둥 칠 때는 변화하지 않는다. 완벽해지려고 애쓸 때는 완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불완전하다"라고 인정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저항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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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킨츠기(金継ぎ)"라는 전통 기법이 있다.
깨진 도자기를 금으로 이어 붙이는 기법이다. 깨진 부분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금으로 강조한다. 균열은 역사가 된다. 상처는 아름다움이 된다. 완벽한 도자기보다 킨츠기로 수리된 도자기가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균열 없는 삶은 없다. 문제는 그 상처를 숨기려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이는 가다. 숨기려 하면 평생 긴장 속에 산다. 받아들이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상처를 받아들였을 때 진짜 내 생활의 일부가 되는 거야."
어떤 이가 한 말이다. 상처를 부정하면 상처는 외부의 침입자로 남는다. 평생 싸워야 할 적이다. 하지만 상처를 인정하면 상처는 나의 일부가 된다.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나인 것이다.
완벽주의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끊임없이 애쓰고, 끊임없이 지친다. 한 번의 실패가 전체를 무너뜨린다. 하나의 균열이 전부를 망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강한 사람은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균열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균열이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균열이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말했다.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부서진 곳에서 더 강해진다."
부서지지 않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부서진 후에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했다. "모든 것에는 균열이 있다. 그 균열로 빛이 들어온다(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균열을 막으려 하지 마라. 균열은 어차피 생긴다. 완벽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균열을 통해 무엇이 들어오느냐다. 빛이 들어올 수도 있다. 새로운 시각이 들어올 수도 있다. 성장이 들어올 수도 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은 균열을 막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균열을 막으면 빛도 들어오지 못한다. 성장도 일어나지 못한다. 완벽함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삶을 산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균열을 인정하는 것이다. 균열을 인정하면 빛이 들어온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가 때로는 아프지만, 그 아픔이 성장이다.
상담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다(wounded healer)."
융이 처음 쓴 표현이다. 치유자는 완벽하게 치유된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상처가 있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한다. 자신의 아픔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
완전히 치유된 사람은 좋은 치유자가 될 수 없다. 고통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픈 사람이 좋은 치유자가 된다. 고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도 울어야 한다. 상담사도 무너져야 한다. 그래야 내담자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야 "괜찮아요, 저도 그랬어요"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아는 것은 아픔의 면제부가 아니다.
아는 것은 아픔을 통과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브레네 브라운, 휴스턴대학교 사회복지학 교수는 "취약성(vulnerability)"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는 처음에 취약성을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숨겨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
하지만 수천 명의 인터뷰를 분석한 결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람이, 숨기는 사람보다 더 행복했다. 더 깊은 관계를 맺었다. 더 창의적이었다. 더 용감했다.
왜 그런가?
취약성을 숨기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늘 경계해야 한다. 늘 연기해야 한다. 늘 완벽한 척해야 한다. 그 에너지가 고갈되면 사람은 무너진다.
하지만 취약성을 인정하면 에너지가 해방된다. 더 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 창조에, 관계에, 성장에.
브라운은 말했다. "취약성은 불확실성, 위험, 감정적 노출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용기의 본질이다."
완벽한 척하는 것은 쉽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인 것이다.
도널드 위니컷, 영국의 정신분석가는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완벽한 엄마가 아니다. "충분히 좋은" 엄마다.
위니컷은 말했다. 완벽한 엄마는 아이에게 해롭다. 아이가 좌절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좌절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 나갔을 때 무너진다.
충분히 좋은 엄마는 때로 실패한다. 때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아이의 성장을 돕는다. 아이는 좌절을 경험하고, 좌절을 견디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를 달래는 법을 익힌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충분히 좋은 나"면 된다. 완벽한 내가 아니라. 때로 실패하고, 때로 무너지고, 때로 망가지는 나. 그래도 괜찮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학대다. "충분히 좋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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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알아도 아프다. 그래도 알아야 한다.
망가져도 괜찮다. 망가진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식이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하지만 고통에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이 붙으면 덜 무섭다. 정체를 알면 덜 혼란스럽다. "내가 미친 건가?"라는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지식이 고통을 줄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을 단축해 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헤매는 시간이 줄어든다.
지식이 고통을 피하게 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고통을 견딜 힘을 준다. 이것도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어둠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망가져도 괜찮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상처가 있어도 괜찮다. 균열이 있어도 괜찮다. 그 균열로 빛이 들어온다. 그 상처가 나를 인간답게 만든다. 그 불완전함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
니체는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수정하고 싶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해 없는 고통은 그냥 고통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상처만 남기고 간다. 하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인 고통은 배움이 된다. 다음번에는 더 빨리 알아차리게 된다. 다음번에는 덜 깊이 무너진다. 다음번에는 더 빨리 일어선다.
그것이 성장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는 것.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파도 계속 가는 것. 완벽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채로 살아가는 것.
심리학 책을 백 권 읽어도 새벽 3시의 불안은 찾아온다.
편도체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어야 한다. 전두엽을 훈련시켜야 한다. 언젠가 전두엽이 편도체보다 먼저 반응할 수 있도록. 언젠가 "아, 이건 그거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언젠가 공포에 이름을 붙이는 속도가 빨라지도록.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우리는 계속 무너지고 계속 일어서야 한다.
아는 사람도 아프다.
모르는 사람도 아프다.
완벽한 사람도 아프다.
망가진 사람도 아프다.
다만, 아는 사람은 자신이 왜 아픈지 안다.
그리고 망가진 것을 받아들인 사람은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앎이, 그 수용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등불이 된다.
그러니 망가져도 괜찮다.
당신은 새 스마트폰이 아니다. 스크래치 하나에 가치가 떨어지는 상품이 아니다. 당신은 킨츠기 도자기다. 균열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상처가 있어서 더 가치 있는, 망가졌기에 더 인간다운 존재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알아도 아파도 된다.
무너져도 된다.
다만, 다시 일어서면 된다.
그것이 전부다.
아는 것은 방패가 아니라 등불이다. 그리고 균열로 빛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