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책을 안 읽어요.
만화책만 읽습니다.
읽기 능력, 정말 괜찮을까요?”
읽기 연구를 하다 보면 부모들에게서 정말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하는 부모들의 표정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조금 걱정스럽고, 약간은 답답해 보입니다.
그리고 거의 항상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만화는 책이 아니잖아요.”
많은 부모들이 사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만화를 읽으면 읽기 능력이 제대로 자랄까요?
흥미로운 점은 읽기 연구자들의 반응입니다.
연구자들은 이 말을 들으면 생각보다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만화를 어떻게 읽는지
혹시 자세히 보신 적 있으세요?”
아이들이 만화를 읽는 모습을 조금만 유심히 보면,
그 장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우리는 흔히 읽기를 글자를 해독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자를 소리로 바꾸고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 말입니다.
하지만 읽기 연구에서는 읽기를 훨씬 더 복잡한 인지 활동으로 설명합니다.
읽기 연구의 고전으로 자주 인용되는 van Dijk와 Kintsch(1983)는
독자가 글을 읽을 때 단순히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상황 모형(situation model)’을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독자는 텍스트를 따라가며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등장인물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끊임없이 추론합니다.
즉 읽기는 단순히 글자를 해독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야기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입니다.
좋은 독자는 글자를 빠르게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속 세계를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구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지점에서 만화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화를 읽는 아이의 눈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림을 보고, 말풍선을 읽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며 사건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그림과 글을 따로 읽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정보를 동시에 연결하며 이야기를 이해합니다.
인지심리학자 Allan Paivio는 인간이 정보를 처리할 때 언어 체계와 이미지 체계를 함께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를 이중 부호화 이론(Dual Coding Theory)이라고 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그림과 언어가 함께 제시될 때 독자는 정보를 더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후 Sadoski와 Paivio(2001)의 연구에서도 이미지와 언어가 결합된 텍스트가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만화는 단순히 그림이 많은 책이 아니라
이미지와 언어를 동시에 활용하는 읽기 환경입니다.
만화를 읽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먼저 그림을 보고, 그다음에 말풍선을 읽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은 이런 과정을 시선 추적(eye-tracking) 기술로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독자들은 보통 패널에 들어갈 때 먼저 그림을 훑어보고,
그다음 텍스트를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림이 장면의 맥락을 먼저 보여 주기 때문에
독자는 이미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글을 읽게 됩니다.
그래서 만화를 읽을 때는 글만 있는 텍스트보다 읽기가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림이 일종의 인지적 발판(scaffolding)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만화 읽기가 단순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는 그림과 텍스트 사이의 관계를 계속 해석해야 합니다.
한 칸에서 다음 칸으로 넘어가며 장면 사이의 시간 흐름을 추론하고,
등장인물의 표정과 말풍선을 함께 보며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지과학자 Neil Cohn은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며
만화를 하나의 시각적 언어(visual language)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만화를 자주 읽는 사람일수록 이미지
서사의 구조를 더 빠르게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겉보기에는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만화 읽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해 과정이 들어 있습니다.
조금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읽기 방식은 낯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웹툰을 스크롤하며 읽고, SNS에서 사진과 글을 함께 보며, 영상과 자막을 동시에 이해합니다.
텍스트만 존재하는 환경보다 이미지와 언어가 함께 존재하는 환경에 더 익숙합니다.
최근 문해 연구에서는 이런 능력을 멀티모달 문해력(multimodal literacy)이라고 부릅니다.
글뿐 아니라 이미지와 다양한 시각 정보를 함께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만화는 아이들에게 특별히 낯선 매체라기보다,
오히려 지금의 읽기 환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매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들에게 종종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이의 독서에도 입맛이 있다고요.
어른도 좋아하는 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읽기는 대부분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읽기 연구에서도 흥미는 중요한 요소로 이야기됩니다.
흥미로운 텍스트는 독자의 몰입을 높이고, 몰입은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집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이야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읽기를 경험하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야기 구조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워 갑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읽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며 다음 장면을 예상하는 경험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이 쌓이면 아이의 읽기는 점차 더 긴 이야기로 확장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물론 만화만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깊은 독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화는 아이에게 중요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웃고,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고,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느끼는 경험은
읽기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만화책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본다면,
그 모습을 조금 다르게 바라봐도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이미
읽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