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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mentine Feb 24. 2024

2.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자기만의 방


나의 취향은 언제나 꽤나 편향되어 있다. 이는 사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사진을 사진으로만 다루는 형태에는 딱히 끌림이 없다는 것이다. 커다란 크기로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이 사진 한 장에 빠져드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웅장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담았다면 모를까 또 초상화는 흔치 않다. 그러던 내가 2024년 첫 전시 나들이에서, 한참을 몰입하게한 순수한 초상화를 만난다. 오래된 유화를 보면, 평면 작품을 보면서도 어딘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몽환적인 체험을 하는 것처럼, 그런 끌림을 주는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초상 사진이었다. 지하철 광고에서 자주 스쳐간 전시 광고판을 보고도 ‘조금 신비로운 초상화'라고 생각했던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바로 논문 지도 교수님의 강력한 추천이었다. 그렇게 교수님과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콜라보는, 사진 공부를 하면서도 20세기 이전의 사진을 들추어볼 일이 좀처럼 없던 나를 19세기 초의 빅토리안 시대의 매력에 빨려 들어가게 하였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은 1815년에 태어난 영국 사진작가로 48세의 나이에 처음 카메라를 잡았다. 그녀의 첫 카메라는 딸과 사위가 선물해 준 것으로,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당시대의 카메라는 물론 지금 같이 작고, 클릭만으로 촬영이 되는 용이한 방식이 아니었다. 콜로디온 습판 방식이라고 불리던 그때의 사진 기술은 네거티브가 마르기 전에 감광, 노광, 현상을 한 번에 해야 하는 까다로운 기술을 필요로 하였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쓸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을 익히고 있어야 함을 의미했고, 그래서 모두가 누리기는 어려운 활동이었다. 이렇게 커다랗고 특별한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또한 경제적인 여유가 뒷받침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귀족과 부르주아에 편향되었던 사진술의 역사는 그들의 영역에서 또한, 성별에 따른 차이를 보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빅토리안 시대에 결혼과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이분법적인 성역할이 확연히 존재했음을 알아야 한다. 즉, 남자는 사회에서 활동하며 돈을 벌었고, 여자는 엄마와 아내로서 가정의 영역을 지키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때문에 사진을 기술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남자들이었으며, 덕분에 그들은 프로필 사진을 통해 영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반면, 여성들은 기술적으로 완벽히 사진을 구사해 내도, 늘 ‘아마추어’의 영역에 머물렀으며, 그저 ‘취미 생활'로 카메라를 든다고 여겨질 뿐이었다. 많은 빅토리안 시대의 여성 사진작가들이 그러하듯,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사진이 집의 실내, 또는 안뜰에서 가정 안의 사람들의 초상화를 주로 촬영한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보면 쉽다.


주 드 폼 (Jeu de paume)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의 제목은 “Capturer la beauté” 즉 ‘아름다움을 포착하다'였다. ‘아름다움’이라는 요소는 ‘흐릿함'과 ‘근접 촬영’이란 단어와 함께 그녀의 작품을 묘사할 때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표현하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을 눈여겨보자면 어린아이부터 다양한 연령 때의 여성들의 초상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곤히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천사 날개를 달고 턱을 괴고 있는 나른한 표정의 아이와 마주하며, 우리는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시선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모성애적인 시선이 포착하는 ‘아름다움’이다. 미국 예술 평론가인 아비가일 솔로몬 고도는 2015년도 프랑스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의 협업으로 열렸던 전시, Qui a peur des femmes photographes (누가 여성 사진작가들을 무서워하는가?) 카탈로그에서 그녀의 사진을 ‘가부장적 규범에 반대되는 모성애적 시선’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의 사진이 그녀의 사후에 활발하게 회자되는 이유는, 시대적으로 아마추어의 영역에 머물렀던 그녀의 사진을 그 이상으로 평가하기 위한 많은 연구자들의 노력과 같다. 이는 사진이 예술로 인정되기 이전, 사진 매체를 통해 독창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비상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모성애적 시선처럼, 그녀의 작품에서 은은하게 피력되는 페미니스트적 표현 방식이 더욱 흥미롭다. 먼저, 그녀가 촬영하는 인물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데,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은 주로 연약하고 지친 노인들을 남성 피사체로 채택한 반면, 여성들은 모두 젊고 아름다운 모델을 촬영함으로써 양극적인 묘사 방식을 드러냈다. 또한 아래의 사진에서처럼, 여러 여성들의 등장은 자매들의 응집력, 결속력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수백만 년 동안 방 안에만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제 벽에 여성들의 창조력이 모두 스며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의 한 구절이다.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은 버지니아 울프의 이모할머니이기도 한데,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이 직접 여성의 권리에 대해 적나라하게 피력하지 않는다고 해도, 1929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나오기도 전 자기만의 집을 촬영 스튜디오로 만들어, 예술적 표현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활동은 가히 강렬하다.



전시장을 나오며, 빠질 수 없이 들리는 미술관의 서점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과 버지니아 울프의 합작으로 만개했던 서점을 보고는 두 사람의 강렬한 팬으로서 내적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의 짧은 텍스트가 함께 실린 작은 책을 구매해 왔다.


빅토리안 시대에, 가정을 가사에 한정된 공간에서 탈피시켜, 포토그래퍼라는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서 활동하는 무대로 탈바꿈시킨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을 우리는 가히 '빅토리안 시대의 아방가르디스트 페미니스트'라고 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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