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오닌의 난
겐페이 전쟁이 “무사 정권의 시작”이라면,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은 무로마치 막부가 완전히 힘을 잃고, 전국시대(戦国時代)가 열리는 계기가 된 내전. 기간: 1467년(오닌 1년) ~ 1477년(분메이 9년), 약 11년간. 장소: 주 전장은 거의 교토 시내와 주변 – 도시 전쟁에 가까움. 동군(東軍):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를 중심으로 한 파벌, 서군(西軍): 야마나 소젠/모치토요(山名宗全) 중심 파벌. 둘 다 아시카가 쇼군가와 가까운 유력 슈고 다이묘(수호대명)들이었기 때문에, 이 싸움은 “막부 내부 권력투쟁이 전국 다이묘들의 편싸움으로 번진 내전”.
당시 쇼군은 8대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원래는 아들이 없어서, 동생 요시미를 승계자로 삼으려 했음. 그런데 뒤늦게 아내 히노 토미코가 아들(훗날 요시히사)을 낳으면서 “동생 요시미 vs 친아들 요시히사” 중 누가 쇼군이 될지 문제. 요시미를 미는 편: 호소카와 카츠모토, 요시히사를 미는 편: 야마나 소젠 + 히노 토미코이 붙으면서, 양쪽 유력 슈고 가문이 쇼군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하는 구조. → 쇼군 후계 싸움 + 전국 슈고 가문의 후계 싸움 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누가 누구랑 왜 싸우는지 당사자도 헷갈릴 정도의 대규모 편가르기 내전” 이 된 게 오닌의 난의 특징.
1467년, 교토 북쪽 가미고료 신사 근처에서 동군·서군 병력이 먼저 충돌 → 이것을 오닌의 난 개전으로 봄. 양쪽 다이묘들이 자기 영지의 병력을 끌고 와 교토에 상주하며 싸운 탓에 귀족 저택, 사찰, 상가, 민가가 방화·약탈·점령으로 계속 파괴. 당시 기록에 따르면 교토는 “수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찰·문화재가 소실. 1473년, 동군의 호소카와 카츠모토, 서군의 야마나 소젠이 거의 동시에 사망. 지도자가 사라지자 “굳이 교토에 남아 싸울 이유”가 약해진 다이묘들이 하나둘씩 자기 영지로 돌아가.
어느 쪽도 완전히 승리하지 못했고 쇼군 권위도 전쟁 전보다 더 약해진 탓에, 누가 이겼냐고 하면 사실상 “다 같이 진 전쟁”.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은 이름뿐, 교토 주변의 질서도 회복되지 못해. 각 지역에서는 원래 막부 휘하 슈고였던 집안, 그 밑에서 힘을 키운 고쿠진/국인, 농민 잇키 등이 서로 다투며 “센고쿠 다이묘(전국 다이묘)” 로 성장. → 중앙집권이 무너지고, 일본은 “각 지방 군벌이 자기 땅을 지키고 넓혀 가는 전국시대” 로 들어감. 약한 주군을 버리고 더 강한 세력에 붙거나, 심지어 부하가 상관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일반화. 이 ‘하극상’ 문화는 훗날 오다 노부나가 같은 신흥 다이묘가 급부상할 수 있었던 토양이기도.
전쟁 직후 교토는 귀족과 옛 권문세가가 몰락하고, 황폐화된 도시 일부에 ‘쵸닌(상공업자)·승려·지방 출신 무사’들이 모여 새로운 거리·문화가 형성. 나중에 ‘와비·사비’ 미학, 노·차도 등 전국~아즈치·모모야마 문화를 낳는 밑바탕도 이 혼란 속에서 성장했다고 보는 연구도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