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에세이 [ 고요한 1월의 여름]

by Eunjoo Doh


분주하고 경쾌했던 한여름 밤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또다시 달력 한 장을 넘기고 새해를 맞이했다. 그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빠른 물살에 휩쓸려가듯 흘러가는 시간에 머리채를 흔든다.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 싫어졌다. 나이가 몇 인 지도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가끔씩 누군가 묻기라도 할 때면 애써 감추고 싶은 것을 들춰내는 기분이다.


한 살 더 먹은 1월의 뉴질랜드는 한여름이다. 여름의 연초 분위기라고 들뜨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동네는 다른 어떤 계절보다도 고요하다. 대부분의 집들은 가족들과 기나긴 여름 나기를 위해 외지로 떠난다. 바다, 강, 숲이나 산 등 각자 최적의 장소에서 일 년의 고단했던 몸과 마음의 쉼을 얻는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이후로 단 한 번의 긴 여름휴가를 떠난 적이 있다. 이민 초창기, 가장 순수하고 여유로웠던 해, 스무 해 전이다. 어린 딸들을 차 뒤에 태우고 뉴질랜드 북섬과 남섬을 횡단하며 보냈던 2주간의 여행은 용기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바람 타고 날아든 민들레 홀씨들이 돼버렸다. 백사장의 하얀 섬 위에 검은 점들이 콕콕 박히듯,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근사한 배를 타고 나가 직접 잡아온 싱싱한 스칼랍, 그리고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던 뉴질랜드 사람들. 그들의 여름은 내게 낯설고 부러운 세계였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의 여름휴가 풍경은 지금도 여전히 눈에 생생히 남아 아른거린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때 그 바닷가로 간다면 그들처럼 그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까.

여전히 낯선 이 땅에서의 여름 나기는 작은 정원의 초록들이 유일한 위안이다. 이른 새벽 아직 후텁지근한 공기가 스며들지 않는 때, 바람 따라 흔들거리는 꽃대의 우아한 춤은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밤새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운 상추와 파슬리, 딜,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방울토마토와 고추, 밤새도록 피워낸 노란색의 호박꽃은 여름의 속삭임들로 가득하다.


동네 거리는 고요하고, 작은 여름 정원은 소리 없는 초록들의 숨결로 천천히 차오른다.




일러스트

by Eunjoo D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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