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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rs. Blue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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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Doh Oct 13. 2024

봄 II

  


  보통 이른 아침에는 손님들이 드물게 찾아왔다. 티타임 전까지 미세스 블루와 맥스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따뜻한 머핀을 나눠 먹기도 했고 좋아하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가끔 춤을 추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커피 향에 취해 감상에 젖는 때도 있었다.


 보통 시곗바늘이 10시를 지나 티타임이 다가올 때부터 손님들은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원하는 물건들을 찾아주느라 그녀는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잠시 손님들이 뜸해질 무렵, 문 밖에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세스 블루는 소리만 듣고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몸에 힘이 없어 걷는 게 힘든 팔십이 넘으신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발소리, 지팡이를 내딛는 소리, 힘없이 돌아가는 문고리 소리를 미세스 블루는 가게 안에서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할아버지 이름을 몰라 그녀는 항상 “Mr. 젠틀맨”이라 불렀다. 몸이 불편한 “Mr. 젠틀맨” 할아버지가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는지 미세스 블루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 Mr. 젠틀맨 씨,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그동안 얼굴이 많이 핼쑥해지셨어요."


"미세스 블루 씨, 반가워요.

얼굴을 못 본  몇 달 동안 추운 겨울이 지났네요. 이제 따뜻한 봄이 왔는데도 저는 여전히 몸도 마음도 추워요."


" 일단 여기 의자에 앉아 쉬세요.

제가 얼른 따뜻한 차를 만들어 올게요."


"고마워요, 미세스 블루 씨! "


그녀는 따뜻한 레몬차가 담긴 머그컵을 쟁반에 담아 할아버지께 건네 드렸다.


" 뜨거우니까 조심히 천천히 드세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


할아버지는 컵에 담긴 레몬차를 호호 불며 한 모금 마시고는 미세스 블루에게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 지난겨울이 시작되면서 더 이상 아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요. 낮이고 밤이고 눈에 아른아른 떠올라 괜찮았는데 이젠 아무리 사진을 들여다봐도 전혀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질 않아요. 낮에는 그럭저럭 참을 수 있는데 밤이 되면 보고 싶어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Mr. 젠틀맨 할아버지는 조용한 말투로 힘이 빠진 채 미세스 블루에게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끝까지 듣고 있던 그녀는 할아버지께 대답했다.


" 아, 그러셨군요.! 그러면.......

할아버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사다리를 찾으러 일어섰다.

미세스 블루는 높은 사다리를 올라가 팔을 뻗어 기다란 파란색 박스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는 박스를 커다란 봉투에 담아 할아버지께 건네 드렸다. 마음이 힘드실 때 가만히 박스를 여시면 곧 괜찮아지실 거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았다.

본인의 몸도 가누기 힘겨웠을 할아버지는 손에 고구마 두 개를 들고 와 미세스 블루에게 주고 파란색 박스가 담긴 봉투를 들고는 한참을 걸어 집으로 되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 드린 박스 안에는 몽실몽실한 솜뭉치들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안경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안경을 쓰면 하얀 솜들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해 점점 동글동글한 물방울로 변하며 그 안에서 할머니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할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토록 그립고 보고 싶었던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얼굴을 마주 보던 할아버지는 울고 말았다. 하염없이 양쪽 뺨을 타고 주르르 흐르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는 보고 싶을 때마다 상자를 꺼내 안경을 쓰면 할아버지는 언제든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그리움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없었다. 또한 물방울이 둥둥 떠오르며 할머니 얼굴이 나타날 때마다 할아버지의 정원에는 봄꽃들이 하나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화사한 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정원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외롭지 않은 봄날을 보내셨다. Mr. 젠틀맨 할아버지가 이젠 몸도 마음도 춥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에 미세스 블루의 가슴에도 환한 봄꽃들이 피어났다.



일러스트

Eunjoo D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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