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인생 첫 목표가 생기다.
전교 최하위권에서 심화반을 거쳐 의대를 목표로 하다.
인생 처음으로 목표가 생겼다.
중학생 때 친했던 친구들은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되었고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배정받고 입학시험을 치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처음으로 마음을 먹고 고등학교 입학시험 문제집을 사서 공부를 했지만, 성적은 전교 200등 언저리 등수를 받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앞으로 어른이 되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안보였다.
중학생 때까지 공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공부에 흥미가 있지도 목표가 있지도 않았다. 특히, 내게 책은 읽으면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이 오지 않을 때 가끔 집어 들어 잠을 청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공부 외에 체육, 음악, 미술 등 예체능 관련 과목에서는 나름 좋은 성적을 받고 잘하는 축에 들어갔지만 특출 난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 분야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앞에 선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른이 되기는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서웠다. 특출 나게 잘하는 걸 못 찾았고 찾는 방법도 몰랐던 나는 공부라도 열심히 해보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최하위권 성적을 받은 상태로 담임선생님께 무턱대고 심화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심화반을 들어가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과 경쟁을 해야 성적이 좋아질 것이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성적이 하위권인 내가 심화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당시, 교내에서 전교 30등 내외의 성적을 받은 친구들이 심화반에 들어갔었다.
선생님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나의 열정은 이해하셨지만 성적이 하위권인 내가 심화반에 들어간다면 형평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바로 심화반에 들어갈 수는 없고 성적이 향상이 되면 그때 심화반에 넣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마음이 급했다. 이미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생이 된 내겐 더 이상 미룰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심화반을 운영하는 저녁시간이 되면 책을 들고 심화반이 운영되던 교실의 창문 밖에서 수업을 들었다. 복도가 깜깜해서 칠판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상위권 학생들과 함께 심화된 내용의 수업을 듣는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이미 지나간 초중학교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한다면 고등학교가 끝날 때쯤 받아 든 성적에 승복하고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난 뒤 선생님께서는 공부에 대한 열정을 높이 보셨는지 심화반 뒷좌석에 내 자리 하나를 만들어 주셨다. 심화반에 들어가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기초가 너무 없어서 초등학교 때 배우는 기본적인 수식이나 영어 단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상태여서 진도를 쫓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성적은 빠르게 상승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 즈음엔 전교 40등 언저리 등수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고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한 내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이 주변에 생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현재 관심사와 어른이 돼서 갖고 싶은 직업에 대한 얘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위권 친구들은 전문직을 하고 싶어 했다. 특히, 의사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이 상당수를 차지했고 그 영향이었는지 내 목표도 의대에 입학하는 것으로 굳어져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사가 되고 싶었다기 보단 좋은 등수를 받고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수험생들이 그렇듯 하루에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에 올인했다. 한번 앉으면 3시간 가까이 앉아서 공부에 매진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 수업이 끝나면 최대한 빠르게 다녀와서 바로 공부에 집중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교 10등 언저리까지 성적이 상승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학급 반장을 맡게 되었다. 남들은 고등학교 3학년은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시기라 반장을 맡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었지만 수시나 추후 면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반장에 지원하였고 당선되었다. 대학 입학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되는 건 뭐든지 했다. 선생님들도 중학교때와는 전혀 다르게 나를 대해 주셨다.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모습에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시는 선생님들도 계실 정도로 내겐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3학년이 돼서 모의고사를 보면 의대를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 나왔다. 3년 만에 수직으로 상승한 성적표를 보시곤 선생님들께서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도 컨디션 조절만 잘한다면 의대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수학능력시험을 예상했던 것만큼 잘 보지 못했다. 수시로 의대를 지원하기엔 고등학교 1, 2학년 때 성적이 충분치 않아서 지원도 하지 못했다.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의대에 입학했다.
그 친구들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었는데 나는 이루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인생에서 처음 세웠던 나의 목표는 이루지 못한 채 연기처럼 사라졌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목표를 세웠고, 동시에 처음으로 실패를 경험했던 것이다. 그렇게 19살의 소년은 짧은 시간 기대하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인생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는 걸 어린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