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정을 다시 믿는 연습

감정을 믿는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린다는 뜻이 아니다

by 초한

내 감정을 믿는다는 말은

생각보다 오해를 많이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그럼 감정 가는 대로 살라는 뜻인가?”라고 묻는다.

어떤 사람들은

“내 감정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감정은 언제나 사실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때로는 오해가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불안이 실제보다 더 크게 부풀려질 수도 있고,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장면을 더 날카롭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아무 의미 없는 잡음처럼 취급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심리학에서 감정은 흔히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내게 무엇이 중요했고 무엇이 위협처럼 느껴졌는지를 알려주는 정보로 다뤄진다. 최근 연구와 임상 이론들도 정서조절을 감정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고 의미를 붙이고 다루는 과정 전체로 본다. 즉, 회복의 핵심은 감정을 지워버리는 데 있기보다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상태를 회복하는 데 더 가깝다.



감정을 믿는다는 것은 감정에 휘둘린다는 뜻이 아니다

앞의 글들에서 썼듯, 감정을 못 믿는 사람들은

감정을 느낀 뒤 너무 빨리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데 익숙하다.

서운함이 올라오면

“내가 과한 건가?”를 묻고,

화가 나면

“이 정도로 화낼 일인가?”를 따지고,

불안해지면

“내가 또 오버하는 건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네 감정을 믿어”라고 말하면

오히려 더 막막할 수 있다.

무슨 뜻인지 감이 잘 안 잡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감정을 믿는다는 건,

감정이 언제나 옳다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감정을 판결의 대상이 아니라 탐색의 대상으로 다시 놓아보는 일에 가깝다.


예를 들어,

서운함이 올라왔을 때 필요한 건

“그래, 상대가 무조건 잘못했어”가 아닐 수 있다.

먼저 필요한 건

“내가 왜 서운했지?”를 묻는 일이다.

화가 났을 때도

“나는 화를 냈으니 정당해”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이 침범당했다고 느껴졌지?”를 보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즉, 감정을 믿는다는 건

감정의 결론을 믿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을 한 번쯤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다.

DBT 문헌에서도 타당화는 변화의 반대말이 아니라 변화의 전제에 가깝다. 사람은 자기 경험이 이해받을 수 있다고 느낄 때 방어가 조금 내려가고, 그다음에야 더 정확히 생각하고 조절할 수 있다. 감정을 다시 믿는 일도 비슷하다. 감정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그다음 단계의 판단과 조절이 가능해진다.



공감과 타당화는 무엇이 다를까

여기서 하나 구분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타당화를 거의 같은 말처럼 쓰지만, 둘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공감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아, 저 사람은 지금 많이 서운하겠구나.”

“저 상황이면 불안할 수 있겠네.”

이런 식으로 상대의 감정 상태를 짐작하고 따라가 보려는 마음이다.

반면 타당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단순히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감정이 왜 생겼는지, 그 감정이 그 사람에게 왜 말이 되는지를 인정해주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면 이런 차이다.

공감은

“많이 속상했겠다”에 가깝고,

타당화는

“그 말을 들었으면 속상할 수 있었겠다. 네가 그렇게 느낀 게 이상한 건 아니야”에 더 가깝다.

즉, 공감이 감정의 온도를 함께 느끼는 쪽이라면,

타당화는 그 감정이 존재할 자격이 있다고 확인해 주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가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지만,

타당화까지 경험할 때는 조금 더 깊은 차원의 안정을 느끼기도 한다.

내 감정이 단지 “보였다”는 느낌을 넘어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자주 함께 간다.

좋은 공감은 자연스럽게 타당화로 이어질 때가 많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분명 공감은 한다.

내가 힘들어 보인다는 것도 알고, 속상해 보인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곧바로 이렇게 말해버린다.

“근데 그 정도로 상처받을 일은 아니지 않아?”

“네가 좀 깊게 받아들인 것 같아.”

“마음은 이해되는데, 너무 예민한 것 같긴 해.”

이럴 때 사람은 묘한 어긋남을 느낀다.

분명 내 감정을 본 것 같은데,

정작 그 감정의 타당성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감은 있는데도

충분히 위로받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타당화는 꼭 감정을 똑같이 느껴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상대와 똑같이 아프지 않아도,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다”

“그 상황이면 그렇게 느끼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이 점에서 타당화는

“나도 똑같이 느껴”보다

“네가 그렇게 느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에 더 가깝다.

그리고 감정을 잘 못 믿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도 종종 이쪽이다.

누군가가 내 감정을 대신 느껴주는 것만큼이나,

내가 느낀 감정이 과장되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타당화는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있다.

혹시 자기 타당화(self-validation)를 하면

자기합리화만 늘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하지만 둘은 꽤 다르다.

자기합리화는

이미 내린 결론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에 가깝다.

반면 자기 타당화는

결론을 고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하기 위해 감정을 인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내가 화났으니까 상대가 틀렸다”는 건 자기합리화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서 무시당했다고 느꼈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타당화에 가깝다.

전자는 판단을 서둘러 확정하는 방향이고,

후자는 경험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읽어보는 방향이다.

심리치료 장면에서 말하는 타당화도 마찬가지다.

타당화는 동의나 승인과 다르다.

그 사람이 느낀 감정과 반응이 그 맥락에서는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지,

그 감정에서 나온 모든 해석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자기 타당화는

“나는 원래 이래” 하고 멈추는 말이 아니라,

“아, 내가 지금 이런 이유로 흔들렸구나” 하고

내 경험을 읽어내는 말에 가깝다.



내 감정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

감정을 다시 믿는 연습은

거창한 자기확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은 차이에서 시작될 수 있다.

예전에는

감정이 올라오자마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건 그냥 넘겨야 하나

내가 꼬아서 들은 건가

이 정도도 못 견디나


그런데 이제는 질문을 조금 바꿔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 감정은 어떤 장면에서 올라왔나

내 안에서 무엇이 건드려졌다고 느꼈나

나는 지금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나, 없애려고 하나


이 질문들이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 차이가 꽤 중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감정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대개

감정이 틀렸는지부터 판정하는 데 익숙하지,

감정을 읽는 데 익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서조절 연구들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한다. 감정조절의 핵심은 단순한 억제나 통제가 아니라, 감정을 구별하고 의미화하고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능력 전체와 관련된다. 그래서 감정을 곧바로 눌러버리는 습관은 오히려 자기이해와 조절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감정을 바로 고치지 않는 연습

감정을 잘 못 믿는 사람들은

감정이 올라오면 너무 빨리 고치려는 경향이 있다.

슬프면 덜 슬퍼져야 할 것 같고,

불안하면 빨리 안정되어야 할 것 같고,

서운하면 그 감정을 정리해서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감정은 어떤 면에서

고쳐야 할 고장이라기보다

읽어야 할 신호에 더 가깝다.

물론 모든 신호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신호를 무시한다면

결국 나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점점 더 모르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건

감정을 바로 수정하려는 태도 대신,

감정을 잠시 붙잡아 두는 태도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금 나는 불안하구나.”

“이 불안은 단순히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어떤 가능성을 위험하게 느끼기 때문일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서운하구나.”

“이건 단순히 예민해서가 아니라, 내게 중요한 기대가 건드려졌기 때문일 수 있겠다.”

이 말들은 감정을 부풀리는 말이 아니다.

그저 감정이 지나가기도 전에 삭제해 버리지 않기 위한 말이다.

일상에서 감정의 무효화를 경험한 날일수록 정서와 스트레스를 더 부정적으로 경험했다는 연구는, 반대로 말하면 감정을 조금 더 이해 가능한 것으로 다루는 경험이 정서적 안정에 중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감정을 곧바로 무효화하지 않는 태도는 생각보다 실제적인 회복 자원이 될 수 있다.



감정은 판단 이전의 자료일 수 있다

내가 이 시리즈를 쓰면서 계속 붙들고 싶었던 문장이 있다.

감정은 정답이 아닐 수 있지만, 자료일 수는 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냐면,

감정을 못 믿는 사람들은 자꾸 감정을

“맞다/틀리다”의 문제로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은 먼저

“무슨 일이 있었나”를 알려주는 자료일 수 있다.


서운함은

내 기대나 관계감각이 건드려졌다는 자료일 수 있고,

분노는

내 경계가 침범되었다고 느꼈다는 자료일 수 있고,

불안은

내게 중요한 무언가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라는 자료일 수 있다.

자료를 다루는 방식은 판결을 내리는 방식과 다르다.

자료는 일단 모아보고, 읽어보고, 맥락을 본다.


바로 폐기하지 않는다.

감정을 다시 믿는다는 것도 비슷하다.

“이 감정이 100퍼센트 맞다”가 아니라,

“이 감정은 지금 내 상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일 수 있다”라고 보는 것.

이 태도는 특히 자기기준을 다시 세우는 데 중요하다.

내 감정이 늘 외부 기준에 의해 삭제되면

나는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선명하게 알기 어려워진다.

반대로 감정을 자료로 다루기 시작하면

조금씩 내 안의 기준도 돌아오기 시작한다.



관계보다 먼저, 내 안에서 타당화가 필요할 때

물론 가장 좋은 것은

관계 안에서 타당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네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그 상황이면 충분히 서운했겠다”

“일단 네 마음부터 이해돼”

이렇게 말해 주면

사람은 확실히 덜 외롭고 덜 방어적이 된다.

실제로 커플 연구에서도 타당화 반응은 더 나은 정서적 결과와 연결되고, 짧은 타당화 훈련만으로도 부정 정서가 줄어드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즉, 타당화는 듣기 좋은 예절이 아니라 관계 속 정서를 실제로 바꾸는 상호작용 방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늘 그런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내 감정을 적절히 다뤄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관계에서 충분히 받지 못한 타당화를

내가 내 안에서 조금씩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

그건 거창한 자기애가 아니라,

적어도 내 감정을 처음부터 증거불충분으로 기각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내가 또 오버했나?” 대신

“일단 나는 이렇게 느꼈구나.”

“이 감정이 왜 올라왔는지 조금 더 볼 수 있겠다.”

이 정도의 문장만으로도

내 안의 분위기는 꽤 달라질 수 있다.



내 감정을 다시 믿는 연습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감정을 다시 믿는 연습은

크게 세 가지에 가깝다.

첫째, 감정의 이름을 먼저 붙여보는 것.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화인지, 서운함인지, 불안인지, 수치심인지 구분해 보는 일.

둘째, 감정을 판결하지 말고 맥락을 보는 것.

이 감정이 왜 올라왔는지, 무엇이 건드려졌는지 묻는 일.

셋째, 감정을 바로 없애려 하지 않는 것.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 감정을 정보로 다뤄보는 일.

이 세 가지는 단순해 보이지만,

감정을 못 믿는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연습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익숙한 반응은 늘 이해가 아니라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회복은 늘 거대한 변화로 오지 않는다.

가끔은 아주 작은 문장 하나로 시작된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구나.”

“이 감정은 바로 지워야 할 오류가 아니라, 조금 더 들여다볼 만한 신호일 수 있구나.”

이 두 문장만 자기 안에 들어와도

사람은 전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기 시작한다.



자기이해는 자기비판보다 자기인정에서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자기이해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 자기이해는

분석 이전에 허용의 문제일 수 있다.

내 안에 이런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틀렸다고 하지 않는 것.

그 감정을 느낀 내가 유난스럽거나 부족하다고

곧바로 결론내리지 않는 것.

그런 태도가 있어야

비로소 감정도 읽히고,

기준도 보이고,

선택도 조금 더 선명해진다.

내 감정을 다시 믿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무조건 따르는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이 언제나 맞다고 주장하는 일도 아니다.


그건 단지,

내 마음의 존재를 다시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이해는

그 인정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이 시리즈를 처음 쓰게 한 질문은

왜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느낀 뒤, 그 감정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의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짧은 답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감정을 잘못 느껴서가 아니라,

감정을 너무 빨리 지워버리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자기 자신과 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회복은

더 강한 사람이 되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조금 덜 성급하게 대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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