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우리로 하여금 모험을 강행하게 하고 또 우리가 머무는 통상적인 범위를 초월하게 해준다네. 안전한 땅 위에 서 있다고 느끼는 작가는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는 어디선가 읽은 구절을 생각해 냈어. 혁이가 그만두어도 할 수 없고, 윤이가 그만두어도 할 수 없어. 겁 내지 말고. 이 애들이 내세우는 최대의 무기가 바로 이것 아니겠어. 학원을 그만둔다고 엄포를 놓으면 강사는 쫄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아이들. 쫄면 안 돼. 쫄면 안돼. 가카 할아버지는 쪼는 애들에게 빅엿을 안겨주신대. 속으로 노래하다가 그는 혁이와 윤이 얼굴을 떠올렸어.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 그에게도 쓸 카드가 하나 있기는 했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학원에서 공부도 않고, 선생님 말씀도 안 듣고, 학원 그만두겠다는 협박을 하며 대든다고 말하면 녀석들은 쫄지 않을 수 없거든. 그런데 이 방법이 아직 어린애들에게나 통하지 혁이나 윤이에게는 통할 계제가 아니었어. 중학교 2학년만 되면 훌쩍 자라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부모 통제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 소심하고 착실한 몇몇 아이들만 빼고는 말이지. 그러니 강사가 하는 협박 같은 건 약발이 떨어져 버리고 말지. 부모님들도 이미 아이들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해 학업에 대한 기대는 이미 한참이나 접은 상태라 그런 말에 놀라지 않아. 오히려 학원에서 아이들을 잡아두기 때문에 비슷한 성향을 가진 애들끼리 모여, 작당모의 같은 나쁜 짓을 저지를 기회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리고 이때쯤이면 학원을 옮기는 것은 부모님, 그중에서 어머님이 아니야. 아이들은 어느샌가 어머님에게서 학원 선택권을 빼앗아서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지.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않는 애들도 있지만 많은 애들이 그렇게 한다는 거지.
그는 어떤 방법을 택하기로 했을까. 한때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까 대세를 따라야 한다, 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어. 정치권에서 나왔는지 시민 운동 단체에서 나왔는지는 몰라. 원장의 요구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거부하는 몸짓으로 살아내기로 했을까. 아니야. 그는 비겁하게 살라는 전유성의 말에 거부감은 있었지만, 냇가의 바위처럼 물의 흐름을 바꾸며 살 만한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어. 다시 말하지만, 이 학원을 어떻게 바꾸어 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
닥쳐오는 어려움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 필사즉생의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결국 그는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초등부 수학 선생 말처럼 무식하게 아이들을 ‘닦아 패기’로 작정했어.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리지 말라는 말에 공감하던 때에 비하면 그도 많이 변했다고도 할 수 있지. 어쩌면 그 사회가 그 사람을 낳는지 모르겠어. 뭐 사람들이 그 사회를 만든다고? 아무튼 처음 그 말을 수학 선생에게 들었을 때 그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어. 팬다는 말은 알 수 있었지만 닦아 팬다는 말은 뭔가 이상한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느낌은 있었지. 닦아 팬다는 말은 무조건, 이유가 필요 없이 팬다는 거였어.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말이지. 지금은 아마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는 그가 한 것처럼 할 수 없을 거야. 벌써 10년도 전에 일어났던 일이라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지.
월요일 중학교 2학년 4교시, 특 시간이었어. 원장은 3시간 수업하는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1시간 더 잡아두기로 결정했어. 물론 아이들이나 선생들에게 물어보고 만든 것은 아니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원장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어.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고. 아마 원장은 1시간 더 늘리면 분명 학부모들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누구보다도 학부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왔고, 실지로도 그랬으니까. 아이들은 어땠을 것 같아. 학교 수업에 더해 학원 수업 세 시간을 한 후, 거기에 한 시간을 더 한다고 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을 거야. 어른들은 왜 마음대로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들끼리 울화통을 터트리기도 했을 것 같아. 글쎄, 이런 방식이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잘못되었다고 여겨졌지만, 그때까지도 권위 있는 자가 정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사회 분위기였어. 여전히 장유유서가 살아있는 나라에서, 아랫사람이고, 배우는 입장에 처한 자로서. 어떤 사람들은 수직적인 인간관계의 원인을 강점기 일본 군대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해. 하지만 처음 관직에 오른 신참들에게 면신례라는, 혹독한 신고식을 했던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아. 강사들도 마찬가지였어. 누구도 원장에게 말하지는 못했어. 그랬다가는 당장 학원을 그만두고 나가라는 말을 들을 테니, 쉽게 말할 수 없었어. 그가 용기를 내서 한마디 하기는 했어. 어떤 표도 나지 않았지만.
“애들이 좀 힘들어합니다.”
이 말에 원장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을 거야.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험악해진 원장의 모습. 그는 학원을 그만둔 지 오래 지난 후에도 그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어.
“다른 학원들 다 하는데 우리가 안 하면 결과가 안 보입니까?”
이 말에 그는 아무 말도 못했어, 다른 강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네.”
금방 그는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어. 지금 같으면 갑질을 했느니 어떠니 하면서 떠들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시대가 달랐지. 강준만이라는 학자가 ‘갑질’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 전이거든. 그러고 보면 지금이 많이 좋아진 사회인 셈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한 표 주고 싶군. 사회는 늘 진보를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니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아무튼 원장은 경영자이고 그는 고용인일 따름이었어. 고용인이 아니라 마름이라고 해야 하나. 4대 보험도 퇴직금도 없었으니까 언제든 그만두라고 말하면 그만두어야 하는 비정규직인 것은 확실했지.
스물다섯 문제가 복사된 종이를 아이들에게 주고 났을 때, 아이들 모습은 진짜 시험지를 만났을 때처럼 긴장됐는지 조용해졌어. 볼펜을 들고 진지하게 문제를 노려보기도 하고.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들이 잠시 문제지를 시험지로 착각했으며 그것은 조건반사나 다름없다는 것을 입으로 말해주었어. 곧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거지. 한 아이가 입을 열자마자 금세 독감 바이러스처럼 퍼졌어. 이 와중에 윤이는 금방 문제를 풀고 나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사진을 보여준다고 돌아다니고.
“윤이 자리에 앉아.”
그는 윤이에게 소리를 지르는 대신 부드럽게 제지했어.
“아, 제가 국어 성적이 제일 좋아요.”
“그래, 알지. 자리에 앉아라.”
애가 탄 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윤이는 잠시 앉는 시늉을 하다가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결국 그는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매를 들기로 작정했어.
“이리 나와!”
윤이 그의 앞으로 걸어 나왔어. 고분고분하게 말이지.
“윤이는 안 때리기로 했잖아요.”
부리나케 혁이가 윤이를 구하기 위해 나섰어.
“이번에는 안 돼. 잘할 기회를 줬고.”
그가 단호하게 입술을 다물었어.
“좋습니다. 그럼 손바닥을 맞겠습니다. 엉덩이 말고.”
닦아 팬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매가 윤이 손바닥에 맞아 생기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 한 대 맞은 윤이는 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어. 다른 아이들 역시 조용하게, 잠시 자신을 잊고 있었던 것처럼 집중하는 척하고.
그는 한때 만화로 읽었던 초임 교사의 수업 장면을 생각해 냈어. 많은 아이들 앞에 서면 떨려서 제대로 수업하기 힘들지. 그런 경험이 있다면 쉽게 알겠지만, 아이들이 어리다는 생각은 별 도움이 안 돼. 그럴 때는 좋은 방법이 있어. 아이들 머리 대신에 수박이나 호박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면 떨리는 증세는 사라지고 쫄지 않고, 잘하게 되지. 그 선생님 이름이 뭐였지. 아마 사회과 남영식 선생님이었지.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어. 그 선생님처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수영도 하고 축구도 하면 좋을 거야. 그렇지만 열과 성을 다하는 선생님이 될 수는 없어. 현실은 만화와 다르지. 어떤 순간에는 열정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독이 될 수 있어.
아이들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문제를 풀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어. 그는 조용하게 앉아 있기만 해도 고맙다고 생각했을 거야. 과거 유행했던 말처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까. 그는 불안해졌어. 떠드는 소리에 분격한 원장이 부리나케 달려올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러면 그는, 이런 단어를 써도 좋다면, 아이들 앞에서 또다시 모멸감을 느낄 것이고, 또 우울해질 것이고, 불길한 꿈을 꾸게 될 게 틀림없었어. 도대체 벗어날 길이 없군. 쳇바퀴도 이런 쳇바퀴가 없어. 언제쯤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까. 조금만 참으렴. 그는 자신에게 말했어. 넌 그런대로 잘하고 있어. 언제쯤 내게도 좋은 시절이 올까. 좋은 시절이라고? 내게는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어. 하는 일마다 잘되지 않았어. 아주 사소한 일부터 틀어졌으니까. 그는 꿈속에서 본 호수를 생각해 냈어. 눈 덮인 호수 아래에는 두꺼운 얼음이 깔려 있었어.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쉽게 녹지 않을 것 같은 얼음.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은 꿈이었어.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버려진 호수였어.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윤이에게 문자가 들어왔어.
“생각해 보니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선생님!”
그는 주저 없이, 이것은 간혹 드러나는 녀석의 진심이라고 믿었어. 다른 아이들 앞에서 곧잘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는 잊어버렸고.
“잘 자라, 안녕! 고달픈 중생아.”
이런 식으로 하루가 끝난다면 학원 생활은 그에게 견딜만한 것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이틀이 지난 후 그는 잠시 아이들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