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선생님, 어느 대 나왔어요?
오늘이 일진이 안 좋은 거야. 그는 운수 탓을 하고 있었어. 사주나 점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면서도 행운이라는 게 있다고 믿으며 그걸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불화가 들어있는 날이면 그는 이상하게 어려움에 휘말렸어. 집 앞 철학관 영감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너무 불길이 세, 물이 있기는 한데 한 방울도 안 남을까 걱정이야. 자넨 평생 물을 가까이하고 사는 게 좋겠어. 그리고 자넨 풍상이 많아. 의지할 데 없이 고독하고. 무슨 일에도 실망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좋을 거야. 종교를 가져도 좋고, 물을 떠 놓고 늘 빌어도 좋아. 기도하는 마음, 알겠지? 뭐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아. 47살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것도 꿈꾸지 말게. 47살이 되어야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운이 올 거야.
중3 학년 수업에 들어가기 전 그는 심호흡을 했어. 이 애들 수업을 하는 것이 무서웠거든. 지노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두 명도 이에 지지 않았어.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지. 그는 마초는 아니었지만 무섭다, 고 말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어. 그 순간 그는 학교 가기 싫다고 노모에게 칭얼대던 교장선생님의 우스개가 또다시 생각났어. 슬며시 그는 웃었어. 그러자 최 배달 생각이 났고. 극진가라데로 일본 열도를 떨게 했던 바람의 파이터, 최 배달이 도장 깨기 시합이 있기 전날,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발발 떨었는지. 링에 올라서는 자신도 모르게 오금이 떨렸다고 했고.
어제 그는 수업 시간에 늦은 아이들 손바닥을 한 대씩 때렸어. 이것은 원장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고 요구사항이기도 했어.
“늦게 오는 애들, 손바닥 때리세요.”
누구도 원장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어. 사실 늦게 오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시점이었지.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이들 손바닥을 한 대씩 세게 때렸어. 손이 다치지 않게 딱 손을 잡아 쥐고. 얼떨결에 한 대 얻어맞은 애들은 불퉁해져서 자리에 가방을 탁 놓고 털썩 앉고.
오늘도 원장이 나서서 지각생들을 단속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런 일은 예고 없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좋기는 해. 그래야 아이들은 잠시지만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지. 뒤끝도 없고 말이야.
2교시가 시작되기 전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중3 학년 아이들을 살폈어. 다행히 지노는 중간에 도망가고 없었어. 뽀얀 얼굴에 티 없이 웃는 지노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장난기 많은 초등학생이야. 금세 웃음을 터트리고 바닥을 뒹굴기라도 할 것 같은. 그는 지노가 짜증을 내지만 않는다면 조금도 나쁜 아이로 생각할 수 없었어. 그는 지노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어. 원장도 지노에게는 좀 봐주는 눈치였거든.
“자 문제집을 풀자.”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다가 그가 깨우는 바람에 고개를 들고 왕짜증을 자주 냈던 진이는 말이 없었어. 간혹 보이는 순박한 모습이었지. 영지 옆에 다소곳이 앉아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문제집을 꺼냈어. 물론 영지도 문제집을 꺼냈지. 시험 기간이었거든. 잠시 조용한 상태가 지속되었어. 얼음이 덮인 겨울 강물이 속으로만, 속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그는 둘을 지켜보고 있다가 채점을 해주고, 틀린 것을 고치게 할 작정이었어. 그런데 영지 얼굴을 보니 아예 풀 생각이 없어 보여. 뭐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놀랄 일은 아니었어. 오히려 그것이 영지다웠어. 그는 영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조금 후 그가 보았을 때 진이는 문제를 풀고 있었지만, 영지는 답지를 꺼내 버젓이 적고 있는 거야. 그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어. 잘 모르지만 알려고 노력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서 이런 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말. 그 말을 혼자 되뇌다가 그는 영지를 노려보았어.
“뭐 하러 학원 다니는 거야? 이렇게 공부할 거면.”
영지는 들킨 것을 미안해하지 않았어. 이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영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대들었지.
“모르는 걸 어떻게 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입이 얼어붙었어. 공부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옆에 앉아 같이 풀어보자고 한 적도 있었지만 영지는 거부했어.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어. 아마 영지는 연예인 되기만 하면 이깟 공부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슈퍼주니어 희철이도 공고 전자과를 가기는 했어. 뭐 어쩌겠어. 전에는 초등학교 졸업도 못한 사람이 많았어. 자신의 이름을 쓸 줄 알고, 숫자 계산만 해도 살아가면서 목에 힘줄 수 있었던 때였지. 그렇지만 그는 지난 일과 비교하며 설교할 생각은 없었지. 학교 다닐 때는 내내 놀다가 나중에 절실해졌을 때 공부를 시작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기는 하지. 영지는 이 학원을 얼마나 다닐까. 가만히 내버려 두면 좀 더 오래 다닐 것이고, 강압적인 방법을 자주 쓰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만둘 거야.
그런데 이틀 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고, 그는 영지의 문제집 답지를 뜯어냈어. 물론 진이와 지노의 답지도 찢었지. 영지가 가만히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 애는 발끈했어.
“내 돈 내고 샀는데, 내 돈 내고 학원 다니는데 왜 답지를 뜯어요?”
잠시 그는 소유가 중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지의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어. 소유한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그는 한숨을 쉬었어.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원칙적으로 모든 땅이 국가의 것이었는데.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도 그랬지. 대지는 어머니와 같았어. 사거나 파는 것이 아니었어. 이제는 누구나 땅을 소유하고, 소유물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려 들지. 뭐든 내 맘대로 할 수 있지. 내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내 것 같지만 내 것일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구름이 그렇고 하늘이 그렇고 공기가 그래요. 자식이나 배우자도 그래요. 그는 꼰대처럼 굳건히 말했어.
“내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학생들이 공부하도록 말이다.”
간신히 이런 말을 생각해 냈지만, 영지를 설득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단지 영지는 다른 선생님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보다 생각했을 거야. 어른이나 애들이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별 비판 없이 잘 받아들이기도 하니까.
“입에 물고 있는 사탕을 빼고.”
그다음 영지의 말은 어떻게 이어질까. 그것이 궁금했지. 대답은 의외였고.
“공부 잘하는 애들도 다 사탕 물고 공부해요, 그러면 성적이 오른다고요. 진짜라고요.”
영지는 인상을 일그러뜨렸지만 할 수 없다는 듯 붉은 츄파춥스를 입에서 뺐어. 이런 모습에서 광고에 나오는 여자 모델이 의도하는 성적인 모습은 상상하지 마. 지나가는 여자만 보아도 힐끗거리고 침을 삼키는 색골들이 간간이 있지만, 그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 하초에 기가 모인 정력적인 소음인도 아니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 애에게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시시때때로 고통을 받고 있었거든.
아마 그다음 날이었을 거야.
“선생님 대학 안 나왔죠?”
다짜고짜 던지는 영지의 말에 그는 움찔 놀랐어. 그러면서 영지의 동그랗게 뜬 눈을 보았어. 그는 그 눈에서 심상치 않은 고통을 보았어. 약이 올라 견딜 수 없는 불길도 보았고. 꼭 데자뷔 같았지만, 그는 침착하게 대응하기로 했어. 그렇지 않았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걸 왜 묻는데?”
“선생님들은 다 이야기하잖아요.”
“조은대 나왔다, 왜?”
“아, 글쎄 어디냐고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사실 그는 대학교 1학년 중퇴했으니 학원 강사 자격에는 미달이었어. 2학년을 마쳐야 학원 강사 자격이 있었거든. 이를테면 그는 불법 강사였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처음 이 학원에 올 때부터 그는 속일 생각이 없었어. 그는 이력서에 대학 1학년 중퇴 학력을 기재했거든. 원장도 이걸 유심히 보고, 한참 생각한 후에 그를 채용하기로 했으니까. 그가 생각하기에 원장이 자신을 학원 강사로 채용한 것은 소설을 쓴 이력 때문이었어. 소설이래야 단편소설 몇 개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후 이것 때문에 늘 불안하기는 했어. 감사가 나왔을 때는 원장의 말에 따라 주차장으로 잠시 피해 있기도 하고. 그러나 학생에게 추궁당하게 될지는 몰랐지.
“어느 대학굔대요?”
어떻게 알았을까. 그는 생각했지만 영지가 그것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어. 그 순간 그는 무수한 생각의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어. 폭포 물길을 따라 바다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그래, 네 감각은 대단하구나, 그걸 알아채다니. 출신대를 밝히지 않아 미심쩍었을까. 하지만 영지 말고 이걸 물은 아이는 없었지 않은가. 혹시 원장이 자신도 모르게 흘렸을까. 그럴 리 없어, 검찰도 아니고. 그리고 그 건에 대해서 둘은 공범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은 좀 이름 없는 대 나왔다.”
영지가 세차게 몰아붙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것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알려진다면 그는 학원을 그만두어야 했어. 비참하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굴욕을 참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쉬지 않고 했어.
“어디요?”
영지는 톤을 올렸어. 그는 궁지에 몰린 쥐보다 더했으면 더 하지 못하지 않은 상태였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한숨도 쉬지 않았고. 영지는 이제 한 건 잡았나보다 생각했는데 일이 잘되지 않자, 더 기세가 올랐어. 그런데 그때 보다 못한 진이가 나섰어.
“이름 없는 대 나왔다고 하잖아.”
“서산대 나왔어요?”
가까운 곳에 있는, 서열 순위에도 들지 못하는 대학 이름이 영지 입에서 나왔어. 그 순간 그는 영지가 이 일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번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수업이 끝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학원 생활 내내 이 일을 잊을 수 없었어. 날카로운 영지 목소리도 잊을 수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 장면은 수시로 그에게 떠올라 아찔함을 선사했어.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바보 같은 남자의 모습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