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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산호 Aug 16. 2024

나의 공방일지 6

 박기사는 당연히 받을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어. 입 주변에 난 허연 수염이 입술을 따라 허연 띠처럼 움직였어. 

  - 처음에 올 때 사장님이 월급에 같이 붙여서 준다고 하던데.

  - 그런 게 어디 있어? 법적으로도 그렇게 못하게 돼 있어. 아무튼 난 이번에는 진짜 그만둘 거야.

  - 아이구, 박기사님 그만두면 저도 곧 그만둘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장 아들 고함, 욕 소리에 그만두고 싶어요.

  박기사가 그만둘 거라고 처음 말했을 때는 잠시 놀랐어. 같이 일하던 누군가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면 순간적으로 가슴이 텅 하고 내려앉거든. 직장생활 해 본 사람들은 다 알아. 어쩌면 나도 그와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기 때문이지. 지금 여기, 이곳이 좋지 못한 곳이고, 사람들이 영 이상하고, 나도 곧 이곳을 떠나게 될지 몰라, 하는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지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감각과 사고가 작동한다면,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기운이 한풀 꺾이지. 나만 그런가? 그렇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어도 노화를 병으로 여길 수는 없어. 언제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저절로 죽음에 직면하게 돼. 지금까지 살던 방식으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고. 자신을 낭떠러지 앞에 가져다 놓는다고 할까. 그러면서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는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지. 이것들과 모두 작별하고,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러다가 먼 미래가 아니라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몇 시간 후가 될 수도 있어, 이런 생각에 휩싸이겠지. 아무런 생각 없이, 주위 사람들을 모방하며 살아온 관성의 시간을 하나하나 더듬어 볼 것이고. 유행가처럼 돈도 좋고 사랑도 좋지만, 가치 있게 산다는 건 뭘까 하는 생각에 빠지지. 내가 왜 이렇게 살았나 싶어지는 거야.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지. 철학자가 된다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 흔히 하는 말처럼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게 된다는 말이야.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 지경까지 가지는 않아. 다들 중간에서 그만두게 되지.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죽음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거든. 아니 잠시 장례식에 가서 생각에 잠겼다가 거기서 나오면 잊어버리지. 장례식은 너무 흔한 의례다 싶지.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다가올 죽음을 굳이 지금, 내 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거야. 몇천 년간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왔으니까. 야, 어떻게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 산 사람은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사는 거지. 이런 말을 하기도 하고. 아무튼 죽음의 문턱에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잊어버리려고 애쓰다가, 문득 고인이 생각나 우울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생각나는 횟수가 줄어들게 돼. 그 중간에 죽음이라는 불길한 종자는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 그러면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고 흔한 일로 치부하게 되지.

  박기사는 내게 일을 가르쳐준 사람이었어. 수세미를 쓰는 법이나 퐁퐁을 어디에 풀고, 세척제를 얼마나 뿌리는지, 모두 그에게 배웠지. 신품에 가까운 냉장고를 닦는 법과 지나치게 더러운 냉장고를 닦는 법. 업소용 냉장고는 윗부분에 콤프레셔와 팬이 있어서 위에서부터 세척을 하는 원리 등.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보다 큰 인내심과 섬세한 감각이 필요해. 무턱대고 닦았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지지. 

  그런데 내게는 위엄있게 가르쳐주던 박기사 본인은 간혹 나서서 틀렸다고 말해주는 부장을 인정해 주지 않았어. 내가 보고 있을 때는 그랬어. 곱게 받아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어. 짬밥을 무시한다고나 할까. 나이로 들이밀면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무튼 고집이 센 박기사는 말을 듣는 법이 없었어. 이게 부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그래도 고참이고 부장인데 싶어서. 

  - 말은 또 징글징글하게 안 들어요.

  지금껏 나는 박기사가 일을 못 하는 일못, 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닦아 놓은 냉장고가 왜 이리 더럽냐고 어니스트가 고함을 질러도, 박기사 때문에 같이 덤터기 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런데 어느 정도 일을 알 무렵,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밀려든 부장의 말 한마디에, 징글징글하게 말도 안 듣는다는 말에, 그런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드는 거야. 어느 누가 일 못하고 고집 센 상사를 만나면 개고생이라더니. 꼭 내가 딱 그 짝이었어. 그러고 보면 나도 그리 마음 좋거나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과 충동이 있고, 그 위에 이성이니 감정이니 모자를 쓰게 되는데 별 인간이 있을 리 없어. 내가 나를 생각해 봐도 그래.

  어느 날 둘이 탁자와 의자 배달을 가던 날이었어. 운전하던 박기사가 지난 일을 끄집어냈어. 

  - 한 번은 나하고 싸우고 나간 기사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 그놈 처음에 들어올 때부터 지가 깡패라고 하드라고. 이 지역에서 알아주는 깡패라고 말이지. 이때 알아봤어야 했어. 이놈은 세상을 좀 굴러먹던 놈이구나 하고. 그놈하고 나하고 한 번 싸웠지. 내가 누구냐. 고등학교 다닐 때 씨름 선수였지. 내 체구를 봐봐. 누구하고 붙어도 안 지지. 그 덕분에 학교 다닐 때 싸움도 많이 하고 그랬지만. 그때 나 말고 둘이 같이 있었는데 둘 다 나를 무시했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이가 한두 살도 아닌데 뭐 못한다고 얼마나 무시하는지. 

  -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생겼나.

  내 말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어. 박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어.

  - 어느 놈이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고 했어? 그놈들이 출세하니 이 모양 이 꼴인데.

  맞는 말이었지. 개천에서 난 용, 그들이 높은 곳에 먼저 올라가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었어. 그러니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지. 박기사의 말이 다시 이어졌어.

  - 결국 그놈이 나하고 싸우고 나가서는 사장한테 전화한 거야. 일하는 사람들이 일도 안 하고 눈치나 살살 보고 매일 논다고. 기가 막혔지. 그 뒤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쉬지도 못하고 일만 했지. 그 뒤에 다른 기사도 나하고 싸우고 나갔지. 근데 내 성질만 더러운 게 아니더라고. 넌 부장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지. 물건을 고치다가도 성질나면 다 때려 부수는 거야. 처음에 그걸 보고 내가 얼마나 쫄았는가 몰라.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소리가 들리고 숨을 못 쉬겠더라고. ···그 성질 더러운 거 보기 싫으니까 과장은 이층에 올라가면 아예 내려오지를 않아. 하도 지랄을 하니까 말이야. 참, 내가 용접을 할 줄 알잖아. 그런데 내가 용접한다니까 부장이 영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라고. 자기 하는 일을 건드린다고 그랬나. 밥그릇 건드린다고 그러나. 아무튼 그래. 너도 괜히 아무거나 한다고 덤비다가는 죽는 수가 있어.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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