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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아 Jul 19. 2024

대단한 삶

  솔깃하다. 내일은 가볍게 뒷산이나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양 성곽길 걷기’ 공고가 올라왔다.
  과일 몇 가지와 옥수수를 챙겨 부랴부랴 도착한 동대입구역에서 처음 뵙는 분들, 몇 번 뵌 분들과 인사를 하고 더운 여름 계단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십 분쯤 걸었을까. 힘들다는, 쉬었다 가자는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온다.
  벤치가 있는 곳에서 간식을 나누며 담소도 주고받는다. 땀을 같이 흘리면 금방 친해진다는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다. 초반 컨디션이 좋지 않은 한 분만 빼고 다시 산을 오른다. 어젯밤의 비 때문인지 은은히 올라오는 흙냄새가 진하다. 적당한 나무 그늘, 호젓한 산길도 평화롭다. 행복은 자극이 아니라 잔잔함에 있음을 느낀다.
  "이게 살구나무예요. 떨어진 살구를 주워다 냉장고에 잠깐 넣었다 먹으면 참 맛있어요."라는 선배님의 말씀에 문득 몇 년 전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6.25 때 피난길에 어찌나 살구나무가 많던지. 그때 먹은 기억 때문에 살구만 보면 배고프고 고생했던 게 떠오르는구나.” 내 입맛에는 새콤달콤한 살구가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기억의 단초가 되나 보다.
  시원한 그늘이 있는 자리에 우리는 각자 싸 온 간식을 펼쳐놓고 흥겨운 이야기보따리를 펼친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작가님들 중 한 분인 여 화가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신다. 오랜 고생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외로움과 고통을 토로하신다. 많이 힘들고 고독하셨나 보다. 평소 흠모하는 예술가(미술가)들의 세계인지라 한참을 귀 기울여 듣는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이야기가 끝이 없다. 이젠 좀 멈추셔도 되지 않나, 란 생각이 들 즈음 한 작가님이 "그 이야기는 그쯤 된 거 같다”며 화제의 전환을 제안하신다. 내심 속으로 손뼉을 치며 '끊어주셔서 다행이다' 라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화가님이 한 마디만 더 하시겠단다. 남의 말을 끊어서는 안 되는 거라며 새된 어조로 책망을 하시는 게 아닌가. 순간 모두 당황했다. 말을 끊었다기보다는 분위기상 그 정도에서 전환이 필요해-두루두루 돌아가며 이야기할 기회를 주기 위해-한 작가님이 우리를 대변한 것뿐인데…
  다른 분의 발언으로 그 어색한 상황이 일단락되는가 싶을 즈음 예의 그 화가님이 가방에서 (돈이 들어 있는 듯한) 봉투를 꺼내어 총무님에게 건네며 "이따 뒤풀이 때 써요"라 하신다. 아, 이게 무얼까. 처음 겪어보는 상황.


  내려가는 길은 좀 더 빠르다. 성곽에 쓰인 돌이 시대마다 왕조 때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가는 작가들의 눈은 남다르다.
  선배님이 아름드리나무를 안으신다. 귀를 갖다 댄다. 나도 따라 해 본다. 한 작가님의 “나는 저분들의 말을 들으러 가끔 산에 와요. 우리보다 오래 살았으니 많은 걸 보고 들었을 거 아니에요.”라는 말을 듣고도 저분들이 누구인지를 한참 후에야  깨닫는다. 나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 무심히 지나치는 것을 가리켜 돌아보게 하는 이, 미처 생각이 닿지 못하는 지점까지 섬세하게 짚어내 주는 이, 내가 엄연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소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자각하게 해 주는 이가 작가인가 보다.
  뒤풀이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아까 그 봉투는 인생 선배의 순수한 나눔일까. 베풂일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대가인 걸까. 자식 자랑을 지나치게 하면 흔히들 "그래, 잘난 자식 두었으니 네가 한 턱 내라"라는 말들을 한다. 자기 PR 시대이자 SNS 시대이니 일정 정도의 셀프마케팅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선까지 해야 상대방에게 불편감이나 위화감을 주지 않는 걸까. 사람들은 뭘 그리 드러내고 내세우고 싶은 걸까. 명성이나 지위, 부나 학식이 대단한 사람은 수없이 보았으나 겸손한 사람을 본 기억은 드물다.
  대단치 않은 일상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이야말로 대단한 삶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그리 대단치 않은 내 일상을 향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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