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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리공 Jan 31. 2022

졌지만 졌지만은 않은

학교를 다닐 때 가장 납득이 안 되었던 건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의 비율이었다. 수업시간은 40분~50분이나 하면서, 왜 쉬는 시간은 10분밖에 되지 않고 점심시간이 되어야 그나마 1시간 정도 쉴 시간이 주어지는지 의아했다. 공부를 1시간 했으면 쉬는 것도 1시간이어야 하지 않나.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나의 불만에 귀를 기울여주는 어른은 없었다. 수업이 길어지거나 밥을 늦게 먹기 시작하면 심지어 그 짧은 시간마저도 금방 사라져 조바심이 났다. 그만큼 쉬는시간은 귀했다.



귀한 시간을 어디에다 쓰는 지에 따라 각자의 취향은 확실히 나뉘었다. 나는 남중-남고를 나왔는데, 이렇게 남학생만 모여 있으면 쉬는 시간을 활용하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였다. 밖에 나가 축구나 농구를 하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였다. 쉬는 시간에 운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안하던 친구는 있었지만, 운동을 안 하다가 갑자기 축구나 농구를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초등학생 때부터 쉬는 시간을 공놀이에 투자한 친구들은 이미 일정수준까지 실력이 올라가 있는데, 생전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었다가는 원망을 사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초반 사이 운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초중고 내내 운동을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운동을 안 하는 유형에 속했다. 친한 친구들도 다들 딱히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에 매점을 가거나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며 문득 나도 축구가 하고싶어졌다. 친구들 사이에 껴서 몇 번 공을 찼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이미 실력 차이가 컸다. 자기 팀이 지는 걸 원하는 친구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마지막에 어떤 팀에 떠맡겨지듯이 배정되었다. 축구는 좋았지만 친구들과 하다 보면 금방 기가 죽곤 했다. 



그런데 주변을 살펴보니 나와 같은 친구들이 많았다. 축구를 한 번 해보고 싶기는 한데,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던 친구들만큼의 실력은 되지 않아서 시도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나는 이들을 모아 팀을 만들었다. 생전 축구를 해본 적 없는 친구들끼리 모여 공을 차니 기죽을 일이 없었다. 헛발질은 나만 하는 게 아니었고, 조금만 뛰어도 다들 헉헉대기 바빴다. 누구도 서로를 비난 못할 실력이었기 때문에 다들 마음 편히 축구를 즐겼다. 



시작부터 B급이었던 우리는 팀 이름을 FC때돌이라고 정했다. 때가 많이 나올 것 같은 애들이 모인 팀이라고 그렇게 지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웃긴 이름이다. 남들은 멋진 유럽축구팀 이름을 따서 팀을 만들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B급 감성이 좋았다. 열몇명 되는 팀 내에 축구화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단 두명이었는데 그마저도 학교 축구부에서 버린 축구화를 주워온 분리수거 당번들이었다. 우리끼리만 축구를 하다가 다른 팀과 첫 친선경기를 했는데, 당시 18:0 으로 지다가 그냥 내가 경기를 중단시켜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 FC때돌이 멤버들은 축구를 버리고 농구에 전념했다. 나도 농구를 하러 몇 번 따라가봤지만 별로 흥미가 생기질 않아 그만두었다. FC때돌이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 취업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던 시기였다. 주도적으로 일을 성취한 적이 있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문득 FC때돌이가 생각났다. “저는 축구를 잘 못했는데, 그래도 경기를 하고 싶어서 못하는 애들끼리 팀을 만들어서 경기를 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했지만 주도적으로 축구를 하기 위해 직접 판을 짰던 것입니다. 이처럼 저는 주도적인 인재~~~어쩌구~” 이런 식으로 자소서에 글을 썼다. 쓰고 나서 다시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외국 유학, 해외 봉사도 아니고 주도적으로 한 게 겨우 축구라니. 



근데 당시 면접을 봤던 회사 대표님이 이 부분에 꽂혔다. 생각하기로는 대표님도 운동을 못 하는 무리에서 운동을 하는 무리로 넘어가고 싶었던 학생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FC때돌이 덕분에 첫 취직에 성공하다니. 항상 축구는 지는 팀이었는데 엉뚱한 데서 이겼네. 


때돌이들아 ...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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