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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May 04. 2022

알바를 기억해봄 3

틈새에서 피어나는 꽃

사무실 한쪽 구석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탕비실 겸 휴게실이었다. 말이 좋아 그렇지 실상은 사무실 한쪽 벽 끝부분에 움푹 파인 곳을 활용해 만든, 사람 두 명 들어가면 꽉 차 버리는 ‘틈새’ 같은 공간이었다.


  이곳에 작은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종이컵 한 줄, 직장인의 혈액과 같은 노란색 커피믹스, 늘 있지만 도통 줄어들지 않는다는 티백 녹차, 그리고 물을 끓이기 위한 전기포트가 놓여 있었다.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이 틈새 공간에서 정규직들은 잠시나마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다.


  출근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정확히는, 존재는 알았지만 용도는 몰랐었다. 어쨌든 커피 수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종이컵에 믹스를 넣고, 전기포트 주둥이를 종이컵 쪽으로 기울인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  


  사수에게 갔다. 뜨거운 물이 다 떨어졌는데 어디서 물을 받을 수 있냐고 물었다. 없단다. 내 귀를 의심했다. 다시 물었다. 오늘 물이 떨어졌기 때문에 물이 없단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돼서 혹시 정수기 같은 건 없냐고 물으니 귀찮다는 듯 다른 층에나 가야 한단다.


  그렇다. 알바천국인 이곳에 유일하게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정수기였다. 건물이 아주 오래되기도 했고, 특히 우리 사무실은 구조상 수도관 설치가 어려워 정수기 설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매일 마실 물을 사 와야 한다고 사수가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라고 했다.  


  지금처럼, 배달 주문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원래, 공익요원이 생수를 사 오곤 했는데, 허리가 아파서 더는 못하겠다고 했단다. 찜찜함 반, 속은 느낌 반이었지만 그래도 어쩌랴 육군 현역 예비역인 내가 해야지. 알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공익요원이 담배 피우러 갔다가 들어와 자기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녀석을 바라본다. 키 180에 근육이 얼마나 짱짱한지 입고 있는 티셔츠가 터질 기세다. 허리가 아프다고?? 대부업 형님들이 와도 다이다이 뜰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인데, 생수병 들 힘도 없다고 하니 씁쓸하다. 아, 그러고 보니 항상 근육을 자랑하던 모 연예인도 허리가 아파서 공익을 갔었지.


  녀석에게 물을 어디에서 사 오는지 물었다. 호구 잡았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즐겁게 알려준다. 이렇게나 밝은 녀석이었나? 아무튼 알려준 대로 구청에서 조금 떨어진 구멍가게로 갔다. 장부에 부서명을 적고 생수를 들고 간다. 정확히 2리터짜리 6병인데, 내가 들기엔 꽤 무겁다.



  한 겨울인데도 땀이 뻘뻘 난다. 타고난 약골 + 저체중인 나에게 이건 너무 가혹한 노동강도였다. 사무보조인데 공익 보조도 해야 하다니. 하도 땀을 흘려서 내가 생수를 드는 것인지, 내 몸에서 생수가 샘솟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생수를 사 오고 나서야 커피를 한 잔 타서 자리에 앉았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대부업 팀에서 한 명, 환경팀에서 한 명. 눈치 게임하듯 정규직들이 하나 둘 일어서더니 틈새 탕비실로 돌진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들은 내가 물을 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와 녹차를 타고 있는 정규직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리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그 좁은 곳에 머무르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누가 들을까 눈치 보며 눈짓과 손짓 그리고 귓속말로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길어야 3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매일 하는 야근, 민원인들의 쉴 새 없는 항의, 거기에 날마다 레벨 업하고 있는 미친개 김계장까지. 알바인 나에게나 이곳이 헤븐이었지, 정규직들에게는 삭막한 헬과 같았다. 도무지 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하루 속에서 간신히 틈을 내어 들르는 탕비실은 말 그대로 유일하게 한 숨 돌릴 수 있는 ’ 일상의 틈새’ 같은 곳이었다.


  정규직 공무원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오랜 시간들을 웅크리고 살아왔을 그들. 합격해서 일하고 있으니 이제 좀 피어나나 했는데, 어디나 그렇듯 사회생활은 녹록지 않은 모양이다. 마음껏 꽃을 피워내기에는 그들의 일상이 너무도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시멘트 바닥이라도, 작은 틈새만 있다면 봄꽃은 피어난다. 이 틈새 탕비실에서만이라도 저들의 웃음꽃이 계속 피어나기를 바라며, 오늘도 물은 내가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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