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드 입은 코끼리 Nov 17. 2024

우정의 실금

2주에 한 번씩 격주로 만나는 시간이 둘에게 각별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바뀌어가는 뮤즈에 대한 그림체와 사진의 기록이 거제도를 밝혔다. 거제도의 시시각각 어디에선가 불꽃이 일었다. 그곳에서는 두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다가 한참 동안 서로의 기록이 그려지지 않은 날도 있었다. 송화의 경우가 다반사였다. 계단이 많은 산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솔의 형체가 마치 입체주의 화가마냥 해체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을 완성하는 데 5시간 이상 걸렸고, 솔은 졸음과 사투를 벌이곤 했다. 그렇게 편하지 못한 장소와 시간으로 다분히 시간을 보내자, 마을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화가 송화가 좋아하는 여인이 생겨 2주에 한 번씩 다정하게 정을 나눈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의 출처는 바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젊은 남녀가 만나면 뭘 하겠냐며 서로 히히덕 웃고 조롱을 일삼았다.


그러자 솔의 직장에서도 정분이 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커피를 마시는 중에 스스럼없이 이야기가 나왔다. 무례했다. 솔은 그런 무례한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그 말을 한 사람의 입을 찢어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난동을 피우면 징계를 받을 게 뻔했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싸워야 하지 않겠냐는 순간적인 판단이 떠올랐다. 솔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굳히고 커피를 개수대에 세차게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일절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워낙 좁은 동네이다 보니 저질스러운 말들이 오고 가기 쉬운 곳이었다. 현실에 갇혀 일하는 월급쟁이와 농사꾼들이라면, 자신은 미술계에 남을 한 사람의 뮤즈였고 이상적이고도 예술적인 사람의 떳떳한 친구였다. 하지만 소문이 조금씩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우리는 자주 가던 바에 가지 않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밤, 서로의 얼굴을 흐릿하게 볼 수 있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만났다. 사람들이 자연경관 속을 돌아다니지 않을 그때를 기다려 마을을 피해 위험한 파도와 산길, 그리고 골목길에서 만나 짧게 담소를 나누고 스케치를 했다.

그렇게 또 4달이 흘러 송화의 방은 솔의 그림들로 가득 찼다. 솔의 눈동자부터 시작해 머릿결로 이어진 바다, 상상 속의 비너스, 해체주의적으로 그린 빨간 스케치, 데셍, 크로키, 로코코 방식으로 그린 아름다운 솔의 그림들이었다. 모든 것이 솔로 가득했고, 거제도로 가득 채워졌다. 그림 하나의 가격은 시간으로 채우려고 했다. 가장 오래 그린 비너스의 솔이 가장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한가운데에 배치되었다. 거제도의 파도와 솔의 눈동자라는 제목으로 그린 추상화는 쌍두마차처럼 누드화 옆에 자리 잡았다. 누드화였지만 뒤돌아선 형태라 아슬한 부위는 보이지 않았고, 비너스의 탄생처럼 사람을 반기는 모습이었다.

송화에게 솔은 여전히 귀한 존재였다. 그림들이 모두 솔로 넘쳤지만, 더 그리고 싶은 열망이 컸고, 더욱 상징적이고 아름답게 그리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열정은 그림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솔을 만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쫓기는 마감을 끝내지 못해 다음 날까지 이어졌고, 그것이 반복되자 웹툰계에서 평판이 나빠졌다. 마지못해 그린 그림들이 티가 났는지, 의뢰할 때 디렉션이 많아졌다. 아무리 섬세하게 그리려 해도 자신이 그리는 원조의 그림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현실에 개탄했다. 그리고 절약을 하며 원하는 그림을 꾸준히 진행했다.


송화는 추레해졌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생기가 없었고, 술에 젖어 상상의 솔을 그렸다. 거제도 앞바다에 나가 솔을 생각하며 돗단배를 띄운, 붉은 머리가 휘날리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이제 송화는 솔을 보지 않아도 닿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송화는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 오로지 뮤즈로서만 그녀에게 집착했다. 육체적인 관계는 피상적이었고, 정신적인 나눔 또한 불필요했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솔을 통해서만 가능했기에 그림을 그렸다.


몇 주 뒤 솔과 송화는 거제도의 와현모래숲해수욕장에서 만났다. 솔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하얀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보풀이 일었고, 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찬 바람 속에서도 검은 스타킹과 짧은 검은 스커트를 입고 송화를 마주했다. 송화를 만날 때면 언제나 차려입는 편이었다. 송화는 무채색의 찢어진 긴팔 셔츠와 검정 패딩을 걸친 채였다. 이젤과 함께 작은 캔버스 가방 속 유화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수염이 난 채로 솔을 맞이했다. 솔은 송화가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몇 작품만 보았던 터라 그 이후의 그림들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 물어보려 했지만, 이런 모습으로 온 송화를 보고 실망했다. 자신의 예의를 갖추지 않은 건가. 솔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네요. 당분간은 못 나올 것 같아요.”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송화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둘은 전화번호도 교환했지만, 시간과 장소만 묻고 답했을 뿐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송화는 다시 연락하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기에 그녀를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솔은 답변하지 않았고, 송화는 답답해졌다. 그는 오로지 솔만 보고 살아가는데 왜 솔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송화는 추상적으로 그린 솔의 그림을 보며 뼈아프도록 눈물을 흘렸다.

 

이전 06화 그래서 뮤즈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