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와 솔은 거리를 두고 바까지 걸어갔다. 바에 가는 길은 험한 골목길을 두 차례 지나면 등장한다. 그 골목길은 굽어져 있었고 가팔랐다. 하지만 금방 바를 찾을 수 있는 것은 내부에 붙어 있는 거대한 포스터들과 친절한 이정표 덕분이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씩 힐끔 쳐다보고 들어갔다. 그동안 그들은 대화 한마디도 없이 걷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솔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밝혔다. 그는 자신의 꿈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공무원 생활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고 노력 중이라면서 뮤즈가 된 것도 하나의 직업처럼 느껴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송화는 그런 솔에게 답례로, 마시고 싶은 진, 위스키, 칵테일 등 뭐든지 골라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솔은 웃으며 자신은 도수가 낮은 칵테일이면 충분하다면서 장난스럽게 모히토를 선택했다. 송화는 웃으며 흑맥주를 시켰다. 그리고 둘의 담소가 이어졌다.
"송화님은 그림을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나요?"
"저는 아마 20대 중반부터 그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걸로 돈을 본격적으로 벌었다고 하긴 어렵네요. 원하는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의뢰를 받아 그린 것이니까요."
"원래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도 귀족들의 의뢰로 그림을 그려 밥벌이를 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러니 돈 때문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말 같았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림을 상업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나만의 그림체가 서서히 인터넷 문화에 길들여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해준 솔이 너무나 고마웠다.
"오늘 그린 그림은 오랜만에 제 그대로의 그림체로 그리려다 보니 힘들었어요. 하하."
송화는 맥주를 한 입 삼켰다. 목구멍에 타오르는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면서 눈물이 맺히는 듯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사실 돈 없이는 세상이 굴러가지 않는 것도 맞지만, 그런 사회 속에서 돈벌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예술을 한다는 것이 세상을 또 다른 방법으로 움직이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언제나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며 왜 뮤즈 없이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하곤 했어요. 뮤즈가 있는 피카소나 에곤 쉴레 같은 화가의 작품이 더 스토리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하, 제 미술적 취향이 이렇게 단순해요."
생각보다 깊은 예술관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의 뮤즈가 되는 것을 자처했겠거니 싶었다. 그녀는 모히토를 한 모금 마시며 바텐더 쪽을 바라보았다. 바텐더인 진수가 대화에 끼어들며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검색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양 미술사부터 김홍도까지 섭렵하며 대화를 마쳤다. 송화는 오랜만에 그림에 대해 심오한 대화를 나눠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진정한 그림쟁이임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어느새 흑맥주는 반 이상 줄었고, 솔의 모히토는 이미 비어 있었다. 그들은 바를 나서며 구불구불한 길을 다시 걸어 나갔다. 술에 취한 둘은 서로 침묵 속에 알코올 냄새를 흡입하며 걸었다.
"송화님?"
"네?"
"다른 화풍으로 그린 그림도 있나요?"
"네, 저는 다양한 시도를 좋아해요."
"누드화도 그리시나요?"
"아니요. 여성의 관능을 누드화로 표현하는 것이 망설여져서 그런 그림은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그렇군요. 저도 동의해요. 영화에서 나오는 관계 장면들도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이란 참 복잡하면서도 단순해요. 결국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목적이 좋다가도 싫어지곤 하거든요. 저는 자극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을 일부러 피하려 했어요. 신윤복의 그림을 보고 웃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모나리자를 보고 웃는 사람은 없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 같아요. 모나리자를 보고 해벌쭉 웃는 사람이요."
솔은 송화의 마음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며, 그가 진정한 뮤즈로서 다양한 포즈를 제안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어느덧 둘은 백열등으로 환하게 비추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들어갔는데, 알바생은 그들이 썸을 타는 줄 알았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이를 무시한 채 냉커피 섹션으로 가서 얼음과 커피 캔을 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야외 테이블을 이용해도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밖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파도 소리와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냉커피를 마시며 둘은 서로에게 충만함과 감사함을 느꼈다. 송화는 종이를 꺼내 솔을 크로키로 그렸다. 솔은 자유롭게 움직여도 상관없었다. 송화는 그림 밑에 ‘바다’라는 이름을 적고 솔에게 살짝 보여준 다음, 이 그림은 자신이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솔은 당연하다며 사진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송화는 웃으며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그에게 보내주었다.
"다음 약속이 기대되네요. 더 오래 걸리거나 덜 걸릴 수도 있는 그림으로 생각해 둘게요. 다음엔 노란 벽돌집 안으로 들어오세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이 송화의 콧날을 스쳤다.
"그럼, 아마 2주 후쯤이겠네요. 2주 뒤에 우리, 그림 그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