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자의 유도 수련기 3
결론만 보고 싶은 분은 내려가서 빨간펜으로 그은 큐엔에이만 보세요.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몸과 몸이 대결하는 스포츠에서 체급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유술의 기술을 갈고 닦아 그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걸까요? 유능제강(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함)을 슬로건으로 삼는 유도의 경우, 유도의 발상지인 일본에서는 매년 무차별 체급대회를 엽니다. 모든 선수가 체급에 상관 없이 출전해 경기를 치르는 대회입니다.
하지만 이 대회 역사상 경량급 선수가 우승을 차지한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1990년 무차별체급대회에서 고 코가 토시히코 선수는 본인의 몸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선수들을 물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하지만, 결국 상대 오가와 나오야 선수의 다리대돌리기에 패합니다. (이쪽 링크에서 결승전 하이라이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정말 극소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역사에 남는 것이겠죠. 대부분의 선수는 체중 문제로 체급을 한 단계만 올려도 상대와의 힘 차이 및 키와 리치 차이로 고전하곤 합니다. 그런 이유로 프로 선수들은 시합을 앞두고 죽기살기로 체중을 빼는 것이죠.
리우 올림픽과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현재 -73kg급의 절대적인 세계 최강자로 여겨지는 오노 쇼헤이 선수 역시 무차별체급대회에 도전했지만 고 코가 선수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습니다. (이 도전 과정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으며, 유튜브에 <언제나 정면승부>라는 제목으로 업데이트되어 있습니다. 한글 자막 있음.)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프로 선수라도 체급의 한계를 뛰어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증거겠죠.
오늘은 여자 생활체육 유도인으로서 이 체급의 한계에 대해 느낀 점들을 적어 보고자 합니다.
제 체중은 지난 글에서 밝혔듯 평균 53.5kg 정도에서 위아래로 1~2kg 정도를 오갑니다.
초반에는 이게 크게 문제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1)나는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고
2)초보의 대련 상대로는 이 초심자를 넓은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 줄 수 있는 초단 이상의 사람이 지목되며
3)그들은 초보를 위해 대충 기술이 들어오면 대충 몸을 던져 넘어가 주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그냥 기술을 대강 비슷하게 따라만 해도 칭찬을 듣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쌩초짜의 실력이 향상돼 조금씩 상대도 힘을 주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나의 부족함이 느껴지기 시작하죠. 이제부터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사실 그 정도는 아님) 저는 지금 다니는 도장이 통틀어 세 번째로 등록한 도장인데요(도장을 옮긴 데는 동네가 달라진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사연이 있는데 차차 얘기할게요), 각 도장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강 적어 보겠습니다.
2019년 가을에 제대로 유도를 다시 시작한 저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의 시대를 맞습니다. 유도장에는 점점 사람이 적어지고... 한때는 저 말고 다른 관원이 한둘 오기만 해도 감사한 수준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 관원들의 몸무게가 90~100kg에 육박하는 체대입시생들이다? 와 줘서 고맙긴 한데... 그들의 존재가 고맙긴 한데...(진짜 고마움. 나 혼자 있으면 유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절반따리인 나랑 유도하고 놀아 주는 것도 고마움.) 그들의 무게는 별로 고맙지 않습니다. 힘든 것도 힘든 거고, 체급이 많이 차이나는 사람과 붙어 있다 보면 부상 위험도 높아집니다.
빗당겨치기를 했다가 90kg의 상대가 제 발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얼마간 반깁스를 한 적도 있어요. 엄지발가락 인대를 다쳤는데... 뭐 크게 다친 건 아니라 도장 나가서 깁스 풀고 테이핑하고 운동한 다음 끝나면 다시 깁스 차고 뭐 그랬습니다. (당시 그걸 본 관장님이 "이 사람도 유도 중독이야~!" 하심)
이 곳에 다니던 중 처음으로 저랑 체중이 비슷한 남자 중학생과 대련해 봤는데, 이 경우는 부담없이 이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큰 상대들과는 달리 이 학생은 1)빠르게 움직이고 2)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점이 가장 재밌고 좋았어요.
근데 아무리 큰 사람 상대로는 상대보다 낮게 들어가서 중심을 무너뜨리는 업어치기가 국룰이래도... 상대가 내 두 배면 이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죠. 기울이기부터 너무 힘들죠. 당시 100kg이 넘는 입시생에게 네가 넘어가 주지 않아도 내가 이 기술로 너를 넘길 수 있는 게 맞느냐, 이게 말이 되는 거냐, 하고 물어봤더니 팔을 잡은 채 다리 사이로 들어가서 저 뒤까지 빠져나오면 아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해도 실전에서 비슷한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는 큰 사람에게 하는 게 더 힘들고, 그걸 위해선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거죠.
특히 힘들었던 건 허벅다리를 연습할 때였는데, 관원이 줄고 줄어 저는 이제 입대를 앞둔 90kg짜리 청년과 단둘이 연습을 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상대가 힘 빼고 받아 준다고 해도... 내가 기울이기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막 배운 기술로 90kg인 사람을 한 뼘이라도 들어올릴 수 있을까요? 상대를 움직이기가 불가능하니 내가 기술을 제대로 연습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지금은 군대에 있을 그 친구... 그 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여기는 다른 동네 도장입니다. 이 도장에는 중학생이 좀 많았습니다. 초등학생도 있었습니다.
여기 다니면서 저는 제가 힘이나 운동신경이 좋다는 사실과(남중생들 대비) 뭐 유도 실력... 나쁘진 않네.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도장 얘기는 길게 할 건 없고요,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을 잡는 건 굉장히 수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뭐 그랬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언니랑 하면 다음날 근육통 온다 그래서 미안했던 기억이 나요.
이 곳을 떠난 이유는 일단 학생이 너무 많고 성인회원 수가 적으니, 수업 커리큘럼도 학생들 위주로 돌아가서였습니다. (성인부를 따로 개설해 주시길 건의했지만 떠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음.) 나는 분명히 운동을 하러 갔는데 금요일마다 다같이 참가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수련 시간을 전부 보내면... 별로 즐겁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이 곳에서 얻은 수확은 일단 중학생들 대비 내 역량이 꽤 괜찮다는 걸 알게 된 걸로.
저는 지금 도장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여기 와서 배운 것도 참 많고 선생님도 참 좋고 고마운 관원들도 참 많은데 일단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만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도장으로 온 뒤에도 코로나 시대는 계속되었고, 저는 도장에 입시생 몇명과 저밖에 없는 쓸쓸한 계절을 보냅니다. 여기서 내가 제일 몸이 작고... 매일 잡던 녀석 또 잡고... 내 기술 어차피 상대가 다 알고... 어제 본 녀석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고 다음주도 보고... 내 실력은 맨날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이런 나날을 보내며 저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슬럼프가 왔다 뭐 이런 건 아닌데 더는 전 같은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고... 나 유도 너무 못 하나... 재능 없나...(특: 시작한 지 2년도 안됨 개초짜임) 이런 생각도 하면서 집에서 혼자 울게 됩니다. 선생님도 좀 체급이 맞거나 실력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매일 나보다 잘 하고 나보다 센 사람과만 한다며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그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내 능력에 결국 한계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내가 몸이 좀 더 컸으면 좀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억울함도 있고... 당시 제 머릿속에 있던 의문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귀결될 것 같습니다.
나보다 크고 잘 하는 사람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까?
그래서 그냥 선생님한테 대 놓고 저렇게 물어봤습니다. 답은 간결했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크고 경력도 길다면 당연히 이기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가 커도 내가 유도를 더 잘 한다면 이길 수 있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지금은 진짜 저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그리고 외로운 시기를 거쳐 도장에 관원이 늘고 보니... 매일 아는 얼굴들이던 우리 입시생들만 만나다가 좀 다양한 관원들 만나고 보니까... 아 이게 되더라고요? 뭐 나보다 크고 순수한 근력만 비교하면 어떨지 몰라도 유도에서 초보면 당연히-간단히-제가 이기더라고요? (몇번 해보고 자신감 생김)
체육관에서 생활체육으로 유도를 즐기는 이상, 늘 체급이 맞는 상대와 대련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체중이 가볍다면 더더욱! 그렇게 늘 나보다 무겁고 힘이 세고 잘 하는 상대만 만난다면 좌절감을 느끼고 이 종목이 나한테 맞나, 의심을 할 수도 있겠죠. 근데 그렇다고 내가 매일 스테이크 열 장씩 먹고 덴마크 요구르트 마셔 가면서 15kg을 찌울 수는 없는 노릇이고, 상대한테 내가 좌절감 느껴지니까 더 살살 하고 더 잘 넘어가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유도가 무슨 재미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새로운 기술 연구하기
하고 싶은 기술 매일 연습하기
그냥 매일 수련과정에 열심히 임하기
특별할 것 없죠? 유도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거죠? 근데 진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기가 답인 것 같습니다.
매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같이 연습하던 입시생 친구들도 선생님도 '잡기가 늘었다'거나 '지금 기술 좋았다'는 칭찬을 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던 기울이기도, 탄력있게 차올려지지 않던 허벅다리도 몸이 전보다 잘 구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짜였어요. 또 다른 재미가 생겼습니다. 전에는 오직 기술이 성공하는지 아닌지만이 그 날 수련 평가의 척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잡기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상대의 움직임에 응하고 또 나만의 움직임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더라고요. 그 친구를 넘기지 못해도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빡센 잡기를 풀어나가다가 순간적으로 기술에 들어간다는 게 뭔지 몸으로 알게 되고, 다음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하고... 말 그대로 시야 자체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체급과 힘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유도를 잘 하면 나보다 큰 사람이라도 분명히 이길 수 있다.
단, 체급과 힘의 차이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매일 상대를 이기지는 못해도 오늘의 내가 한 달 전의 나보다는 분명히 발전했다는 게 느껴지니까요. 항상 그 사실을 마음의 지지대로 삼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Q: 남자 이길 수 있나요
A: 경험상 초보 70 초중반대 평균 체형 남자까진 가능. 나보다 잘 하는 상대는 당연히 65kg이어도 못이김.
Q: 여자들이랑은 안 하나요
A: 그동안 여자 관원이 거의 없었음... 검은띠 입시생 친구가 하나 있는데 우리 둘이 하다가 몇 번 다쳤어서 자제중임. 당분간은 기술 안 넣고 잡기싸움만 하려고 함. 그 외 여성관원들은 다 신입임.
Q: 유도에 목표가 있다면?
A: 지금 나를 봐 주는 사람들이 나를 점점 봐 줄 수 없게 만들기. 언젠가는 나랑 진심으로 붙을 수 있게 만들기.
Q: 유도에 목표가 있다면? (2)
A: 나 혼자 성인 여자였던 시간 동안 꼭 다른 성인 여자 선배가 있었으면 했음. 이제 도장에 새로 오는 여자들한테 내가 그런 사람이 돼 주고 싶음. 도장에서 혼자 여자고 혼자 체급이 작으면 나 같은 유도과몰입광인이 아닌 이상 유도에 재미 붙이기가 힘들 것 같음. 지금까지 그런 이유로 그만둔 여자도 많을 듯.
Q: 더 많은 여자들이 유도를 했으면 하는 이유는?
A: 여자 생체유도인이 별로 없는 이유는... 유도가 원래 '남자' 스포츠란 이미지가 있어서기도 하고, 여자가 없으니 신규유입되는 여자들도 오래 못있고 떠나 버리기 때문이라고 봄. 생체 대회에서도 경량급은 참가자가 2~3명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알고 있음. 내 스스로가 더 유도를 재밌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도장에 여자가 더 많았으면 좋겠고, 더 많은 여성들이 유도를 시작했으면 좋겠고, 그렇게 시작해서 오래 취미를 붙인 여자들이 더 많이 유도 이야기를 하고 대회에도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음. 그래야 재밌으니까. 그러다 보면 여자 생체유도의 저변도 넓어질 것이고 생체 풀이 넓어지면 잘 하는 사람도 더 많이 생길 것이라고 봄. (그걸 원함!!! 엄청엄청!!!)
다음 글은... 몸(정확히는 기술이냐 힘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한 화 더 이야기할지 아니면 제가 싫어하는 실전충들 얘기할지 고민 중입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