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그만두니 진짜 교육이 시작되었다 연재 중
미국이라는 땅에서는 자연의 풍성함이 참으로 좋았더랬다. 어딜 가도 대자연이 펼쳐져 있어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나무, 식물, 동물, 곤충들에게 눈길이 가고 관심이 생겼다. 밖에 문만 열고 나가도 각종 이름도 모를 꽃부터 풀부터 나무까지 만개를 이루고 있고 집집마다 마당에 예쁜 꽃들과 나무들로 뽐을 내고 있어서 굳이 나 같은 자연지식 없는 사람이 더하지 않아도 공짜 관람이 가능한데도 직접 심어서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와 이것저것 씨앗을 심어 정원에 심어 키웠었다.
한국에 온 지도 두 해가 지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건지 자연으로 돌아갈 때가 된 건지, 자꾸 나무와 물과 꽃들이 가득한 자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때때로 자연이 있는 곳으로 가보자 다짐을 했건만 항상 쉬는 날은 멀리 가는 것도 귀찮고, 에너지도 없는 느낌이라, 근처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맛집을 가는 것으로 대체하곤 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근처에 있는 카페에 와서 커피 한잔 시켜두고 책을 읽으려는데, 카페 이곳저곳에 푸르른 화분들이 없는 것보단 좋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위로가 된다.
바쁜 도시 안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문득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빛바랜 회색 건물 사이, 초록 하나 없는 거리를 지날 때면 내 안의 무언가가 조용히 말하는 것 같다.
'나, 좀 쉬고 싶어.'
'자연을 보고 싶어.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
이상하다. 어디서든 격하게 살아내고 있는데 살아있다는 걸 자연 속에서 느껴야 제맛인 건지.
학교 일을 하던 어느 날, 딱 일 년쯤 지금 같다. 예전에 같은 곳에서 일하다 친분이 생겼던 후배가 수진이가 일하는 학교 근처에 올 일이 있다고 해서 학교 근처 카페에 들렀다. 학교에서 잠시남아 벗어날 시간이 넉넉지 않은 수진이에게는 일 이외 누군가와 만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일이다. 그날도 그런 마음이 올라왔지만, 그 후배가 벌써 몇 번이나 수진이에게 연락을 했었고 그 횟수만큼 만날 기회를 미뤘던 터라 수진이는 빨리 이 만남을 해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학교의 업무와 스트레스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서 학교 밖에서 잠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 잠깐도 여유롭지 않아 할 일 몇 개를 실장님과 주임선생님에게 맡기고 가야 맘이 그나마 놓였다.
건물 밖을 나오니 햇살이 꽤 따사롭고 밝았다. 나오길 잘한 것 같다. 그 후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눈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손바닥으로 슬쩍슬쩍 가려가면서 근처 카페에 도착했다. 수진이가 먼저 도착했다. 햇살이 직접 닿지 않는 창가와 카운터 사이 적당한 곳에 있는 4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두 팀 정도가 이미 나름대로의 미팅을 시작했나 보다. 적당한 소리의 가요가 흘러나온다. 익숙은한데 무슨 곡인지는 모르는 그런 노래들이다.
거울을 한번 보고 물 한잔을 마시고 창가를 보니, 방울토마토를 심은 긴 화분과 어떤 식물인지 모를 새싹이 엄지손가락만큼 흙을 뚫고 나온 긴 화분 하나가 더 있고, 이미 분홍, 하양, 보라, 노랑꽃이 피어진 화분 몇 개가 보였다. 방울토마토 나무는 오십 센티정도 키가 되었고 친절한 주인장이 토마토 키를 적당히 맞춰 긴 대로 세워져서 튼튼하고 안정감 있게 잘 자라나고 있었다.
더구나 싱싱하고 단단해 보이는 초록 방울들이 꽤 달려있었다. 그저 방울토마토인데 강한 생명력이 전달되었다. 싱그러운 느낌까지 전달되었다. 카페 안에 적당한 온도와 빛과 음악 소리와 방울토마토가 수진이의 마음과 기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수진이는 방울토마토 나무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나도 저런 토마토를 기르고 싶어.’
그렇게 생각만 했는데 수진이 가슴이 콩닥콩닥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참 이상하다. 수진이는 방울토마토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즐겨 먹는 것도 아니다. 어쩔 때는 비릿한 맛이 싫을 때도 있고 입안에서 앙 물었는데 예측지 못한 방향으로 터져버려 옷을 버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방울토마토는 수진이에게 길러보고 싶은 욕망을 끄집어 올린다.
동시에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수진이가 이런 종류의 생각을 할 때마다 겪는 내면의 소리들과 몸의 반응들이다. 수진이는 이 느낌을 아주 잘 안다. 그래서 동시에 뛰는 심장의 두 가지 콩닥콩닥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가장 먼저 오는 콩닥콩닥은 순수하게 수진이가 생각한 대로 정말 토마토 씨앗을 심고 토마토 열매가 달릴 때까지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다. 생각만 해도 설렌다. 상상만 해도 여유로운 어떤 여자가 그려진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그런 여유는 수진이 삶에 없었다. 스스로 거부한 건지 세상살이가 수진이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십이 넘은 수진이에게는 여전히 이런 로망이 있다. 복 많은 카페 주인장은 때마다 철마다 꽃도 심어 키우고, 토마토도 심어 먹을 수 있고, 씨앗을 심어 저렇게 싹을 틔운 화분들을 돌볼 수 있는 삶이 자신의 삶과 비교되면서 슬퍼지기도 했다.
‘난 왜 이렇게 맨날 정신없는 삶을 사는 걸까.
화분하나 길러 볼 생각도 여유도 없는 불쌍한 삶 같으니.’
‘수진아, 네가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 달려야지. 할 일이 태산이야. 그것들을 열심히 다 해놓고 그다음에나 이런 여유를 부리라고! 바쁘잖아.’ 이렇게 수진이를 다그치는 정신 차리라는 콩닥이가 뒤따라온다.
후자의 콩닥이는 수진이 심장이 조여지는 느낌까지 같이 준다. 그리고, 수진이는 그 다그침과 바쁘다 바빠 박동에 익숙하여 재빨리 앞서 느꼈던 그 콩닥 이를 물리친다. 그래도 수진이는 기다린다. 다 내려놓고 싶다. 여유롭고 싶다. 과연 내가 후자의 콩닥 이를 물리칠 수 있을까. 내 인생에 여유롭게 설레는 콩닥이를 걱정근심 없이 영접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자신이 갑자기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그 한 알의 초록이 자라는 걸 지켜보면 마음도 함께 싹을 틔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무언가를 돌보는
보이지 않는 손끝이 나 자신까지도 다정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든다.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수진이 눈에 띈 것은 테이블에 차잣들을 놓고 빵 조각을 둔 아줌마들 그룹과 주인장과 그 앞에서 메뉴를 야무지게 주문하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이다. 젊은 청년은 에어팟을 끼고 있었고 주문을 하는 동안 잠시 오른쪽 에어팟을 빼어 들고 주문이 끝나자 다시 귀에 꽂는다.
얘기를 나누는 엄마들은 한쪽은 젊은 엄마들 세 명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테이블은 나이가 그보다는 있어 보이는 두 명의 그룹이다. 아까 수진이가 들어올 때부터 있었던 그룹들이다. 젊은 아줌마들은 어린아이들을 자녀를 두었는지 어린이집 이야기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고, 다른 쪽 테이블 두 아줌마들은 중고등학생쯤의 자녀들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학원이야기가 주 소재인 듯 보였다.
이 또한 수진이에게는 너무 익숙한 광경이다. 대치동에 살때, 카페에 갈 때마다, 엄마들 군단들이 항상 모여있었고, 그 엄마들 중에는 자식을 성공시킨 노하우를 가진 분이 무언가 정보를 얘기하면 다른 엄마들은 노트필기를 열심히 했던 모습을 매일 봐야했다. 그러면 수진이는 그 소음을 듣지 않기 위해 이어폰을 끼어야 했다.하... 우리는 에어팟을 늘 껴야 하는 저 청년처럼 바깥소리를 차단하고 살기도 하고, 저 엄마들처럼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자식들을 채찍질할 장전을 하기 위해 듣고싶은 말을 들어가며 열심을 내기도 한다. 뭐가 맞고 뭐가 아닌지 모르겠다. 수진이는 늘 봐오던 익숙한 광경이지만 아직도 익숙지 않다.
이런저런 사소한 관찰이 있는 도중에 누군가가 문밖에서 들어왔다. 후배인가 봤더니, 아니다. 이 사람은 어린 젊은 아줌마그룹의 일행이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빈자리에 앉는다.
전화기로 시선을 옮기니 그때 ‘언니’하고 누가 나타났다. 기다리던 후배이다. ‘왔어? 오랜만이야~’ 반가운 인사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날씨 좋다로 이어지고 그들의 오랜 기간 회포를 풀 이야기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야기로 방울방울 예쁜 열매를 만들어가며 수진이의 콩닥콩닥은 없어졌다.
수진이가 느낀 콩닥콩닥거리는 방울토마토를 기르고 싶은 마음은
결국, 자신을 기르고 싶은 마음이다.
빨갛게 익어가는 시간 속에서 마음도
천천히 빛을 따라 자라고 싶어지는 날이다.
어찌 사람이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겠는가.
사람은 성취와 일만 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성과 감정을 가진 존재이지 않은가.
결국, 수진이는 화분 하나를 준비하고 작은 씨앗을 심는다.
이 작은 열매가 하루의 숨구멍이 되어줄 거라 생각하면서.
다음 편: 미국유학을 버리고 온 수진이의 제자 조나단
**글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옵니다.
정말 정신없이 돌아는 세상입니다. 요즘은 더욱 심하다고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면 좀 더 여유진 세상이 될 줄 알았지만 세상은 더욱 물질만능주의가 가속화되고 인간미보다는 '성공', '성취'에 많은 에너지와 마음이 쏠려 그것들을 잡으려 달려가다 보면 가끔은 지치기도 합니다.
요즘 여러분은 몇 초나 하늘을 올려다보셨나요? 옆에 있는 자연을 보셨나요?
“늦지 말아야 해.”, “더 빨리 해야 해.” 빨라야 할 때도 있지요. 그렇다고 매일 달리기만 하면, 나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속도보다 세상의 속도에 먼저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 때, 문득, 작은 방울토마토 한 송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햇살을 가득 머금고, 초록에서 천천히 붉게 익어가는 그 모습.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가 닮고 싶어 집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붉어지고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맛있어지는 존재. 그게 바로 방울토마토가 주는 레슨 같습니다. 나의 삶도 그래도 괜찮았으면 좋겠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고 오늘 삶에 지쳤어도 괜찮다고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조용히 자라고 있는 중이니까요.
잠시, 숨을 고르고, 햇살을 느끼고,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물 한 모금에 기뻐하며 초록에서 빨강으로 익어가는 시간. 나의 속도를 존중하고 감사하는 하루를 꼭 살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