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사회에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남성 부양자’의 신화
남성 부양자 모델의 해체와 공동체적·협력적 성격의 사회적 공간으로 진화
‘Vision 2030’ 정책을 기반으로 여성의 교육·취업 참여 증가
여성 경제활동 증가와 공동체적 가정 형성으로 성역할의 재구성과 사회적 변혁 진행중
사우디아라비아의 가정은 오랫동안 전통적 성역할의 질서 속에서 유지되어 왔다. 남성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여성은 가사와 자녀 양육을 맡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 규범이었다. 이는 종교적 교리와 부족 중심의 사회 구조, 그리고 오랜 세월 누적된 사회문화적 관행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사우디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은 이미 남성을 앞지르고 있으며, 공공부문 고용에서도 여성의 비중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General Authority for Statistics, 2024).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남성 부양자 모델’은 점점 현실과 괴리되어 가고 있다.
2016년 출범한 ‘비전 2030(Vision 2030)’은 이러한 변화의 분수령이었다. 사우디 정부는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시장 다변화와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를 핵심 전략으로 제시했다. 그 결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16년 19%에서 2024년 기준 36%로 상승하며 정부가 제시한 목표(30%)를 초과 달성했다(Saudi Vision 2030, 2024). 더 주목할 점은 단순한 취업률 증가가 아니라, 여성의 직업 형태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사나 간호사, 공공기관 사무직에 한정되던 여성 일자리가 이제는 금융, IT, 물류, 창업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예컨대 리야드에 본사를 둔 한 물류기업은 여성 운전기사를 공식 채용하며 ‘여성 물류팀’을 운영하고 있고, 사우디 항공사들도 여성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했다(Arab News, 2023.09.15).
여성의 경제적 참여는 단순히 가계 수입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우디 사회학자 파하드 알샤흐리는 “가정 내 의사결정 구조의 변화가 사우디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Alshahri, F., 2022). 과거에는 남성이 독점하던 재정 관리와 자산 운용의 주도권이 점차 공동화되고 있으며, 자녀 교육, 주택 구입, 투자와 소비의 결정 과정에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고 있다. 실제로 사우디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결혼한 여성의 58%가 가계 재정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한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2010년대 초반 대비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General Authority for Statistics, 2023).
이러한 변화는 가정 내 관계의 형태를 유연하게 만들고 있다. 과거의 가정이 생계 중심의 단일 기능적 단위였다면, 오늘날의 가정은 공동체적·협력적 성격을 띠는 사회적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남성이 일방적으로 ‘부양자’의 역할을 수행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서로의 역량과 시간, 자원을 결합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는 형태로 이동하고 있다. 예컨대 맞벌이 부부가 공동 계좌를 운영하며 생활비를 관리하거나,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을 역할 분담으로 수행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긴장과 갈등을 수반한다. 세대 간 가치관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며, 일부 남성은 여전히 자신의 부양자 역할이 사회적 정체성의 근간이라고 믿는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협으로 느끼거나, 전통적 가족 질서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는 ‘여성 역량 강화 프로그램(Women Empowerment Program)’을 통해 여성의 금융 접근성, 창업 지원, 직장 내 권리 보호를 제도화하고 있다(Saudi Ministry of Human Resources and Social Development, 2023). 사회 전반에서 여성 인력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전통적 남성 부양자 모델은 점차 시대적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제 사우디의 가정은 생계 단위를 넘어 사회 변혁의 가장 앞선 실험장이 되고 있다. 여성의 소득은 단순한 경제적 지표가 아니라 사회적 자율성과 정체성을 상징한다. 남성 부양자 모델의 해체는 남성의 역할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의 구조가 협력과 상호존중의 원리 위에서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다.
결국, 한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가정이 얼마나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거의 가정이 생계를 지탱하는 경제 단위였다면, 새로운 사우디의 가정은 성평등과 상호의존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진화의 핵심 공간이 되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가 더 많이 버는가’가 아니라, ‘누가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한 시대다. 사우디의 변화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General Authority for Statistics. (2024). Labor Force Survey: Q2 2024 Results. Riyadh: GASTAT.
Saudi Vision 2030. (2024). Vision 2030 Progress Report. Riyadh: Vision Realization Office.
Arab News. (2023, September 15). Saudi women join logistics and aviation sectors under Vision 2030 reforms.
Alshahri, F. (2022). Family Decision-Making and Gender Roles in Contemporary Saudi Arabia. Riyadh: King Saud University Press.
General Authority for Statistics. (2023). Family and Household Survey 2023. Riyadh: GASTAT.
Saudi Ministry of Human Resources and Social Development. (2023). Women Empowerment Program Annual Report. Riyadh: MHRS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