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세상을 정글이라 부른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어 치우고, 승리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전쟁터. 이 살벌한 세계관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바로 다윈의 ‘적자생존’이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서점의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교육받았다. "남보다 앞서라, 강해져라,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도 거대한 오해 중 하나다. 우리가 믿어온 ‘경쟁 중심의 진화론’은 다윈의 통찰을 자본주의적 욕망에 끼워 맞춘 왜곡된 프레임에 불과하다. 진화의 역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생명이 수십억 년 동안 이어져 온 비결은 피 튀기는 경쟁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의 ‘공생’과 ‘협력’에 있었다.
많은 이들이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찰스 다윈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용어의 산생지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 아니다. 이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다. 그는 다윈의 이론을 사회에 적용해 ‘사회진화론’을 창시하며,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다윈은 초기 저작에서 이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스펜서의 조언을 받아들여 <종의 기원> 5판부터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다윈에게 ‘적자(適者 The Fittest)’는 단순히 싸움 잘하는 강자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합한 존재’를 의미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를 ‘강자(The Strongest)’로 오독했고, 제국주의와 성과지상주의는 이를 약탈과 경쟁의 면죄부로 삼았다.
그렇다면 다윈이 본 자연의 진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진화론의 현대적 해석을 정립한 수많은 생물학자는 진화의 결정적 순간마다 ‘공생’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제안한 ‘세포 내 공생설’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복잡한 세포들은 과거에 서로 다른 독립된 박테리아들이었다. 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대신, 상대의 몸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어 공생하기로 선택했을 때 비로소 복잡한 생명체로의 진화가 가능했다. 경쟁했다면 공멸했을 존재들이 협력함으로써 ‘생명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다.
'우드 와이드 웹'의 개념을 정립하고 숲의 공생 원리를 밝혀낸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산림생태학자 수잔 시마드는 숲이 단순한 자원 저장소가 아니라, 나무들이 서로 소통하고 돌보는 정교한 사회라는 사실을 평생의 연구를 통해 증명해 냈다. 위 사진은 그녀의 통찰력 있는 연구와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잘 보여준다.
'우드 와이드 웹'은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을 뒤흔든 발견이다.
수잔 시마드는 1997년,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제 숲에서 외생균근을 통한 나무 종 간의 탄소 이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우드 와이드 웹'이라는 명칭은 당시 네이처 편집자들이 이 논문의 혁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제목에서 유래했다.
이 논문은 당시 생물학계와 산림학계는 그야말로 '지각변동' 수준의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산림학은 "나무들은 햇빛과 영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존재"라고만 가르쳤다. 하지만 시마드는 서로 다른 종(자작나무와 전나무)이 네트워크를 통해 부족한 영양분을 서로 나눠준다는 사실을 입증하며, 자연의 기본 원리가 '경쟁'이 아닌 '상호 부조'에 있음을 증명했다.
나무들이 그저 한 곳에 뿌리내리고 고립된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숲의 지표면 아래에는 인류가 만든 인터넷망보다 훨씬 정교하고 오래된 생명의 통신망이 존재한다. 이 ‘우드 와이드 웹’이라는 네트워크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원리로 나무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공생하게 만드는지 그 비밀을 파헤쳐 보자.
우드 와이드 웹의 실체는 나무뿌리가 아니라, 그 뿌리에 붙어사는 곰팡이(균류)다. 정확히는 ‘균근
( 뿌리곰팡이)’이라 불리는 공생체가 이 거대한 망을 형성한다.
곰팡이는 실처럼 가느다란 ‘균사’를 땅속으로 수 킬로미터씩 뻗어 나간다. 이 균사는 나무뿌리보다 훨씬 가늘어서 흙 속 아주 작은 틈새까지 파고들 수 있다.
한 그루의 나무에 접속한 균사는 옆에 있는 다른 나무의 뿌리까지 뻗어 나가 연결된다. 결국 수많은 나무가 하나의 거대한 균사 그물망으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이 네트워크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동력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경제적 상호호혜에 있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설탕과 같은 탄수화물(에너지원)을 만든다. 나무는 자신이 생산한 당분의 약 20~30%를 균근균에게 통행료로 지불한다.
곰팡이의 제공: 곰팡이는 나무뿌리가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인(P), 질소(N) 같은 필수 미네랄과 물을 흡수하여 나무에게 전달한다.
나무는 영양분을 얻고,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 못하는 곰팡이는 생존 에너지를 얻는다. 어느 한쪽이 착취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한 공생의 관계다.
우드 와이드 웹은 단순한 영양분 통로를 넘어, 정보를 전달하는 ‘숲의 신경망’ 역할을 한다.
한 나무가 해충의 공격을 받으면, 네트워크를 통해 주변 나무들에게 화학적 신호를 보낸다. 신호를 받은 주변 나무들은 즉시 해충이 싫어하는 독성 물질이나 방어 물질을 만들어 대비한다.
햇빛을 잘 받는 거대한 나무(어머니 나무, Mother Tree)는 광합성을 못 해 굶주리는 어린 묘목들에게 이 네트워크를 통해 당분을 보내준다.
놀랍게도 이 연결은 같은 종끼리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침엽수인 미성숙 소나무가 낙엽수인 자작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숲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우드 와이드 웹의 발견은 생물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과거에는 나무들이 햇빛과 수분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경쟁자’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숲은 강한 나무가 약한 나무를 돕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협력 시스템으로 유지된다. 만약 옆에 있는 나무가 병들어 죽으면 나를 지켜주던 바람막이가 사라지고 숲의 습도가 변해 결국 나에게도 피해가 오기 때문이다.
숲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가 네트워크의 중심 허브 역할을 하며, 자신의 자손뿐만 아니라 숲 전체의 묘목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위험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잔 시마드는 이를 어머니 나무라했다. 생태학계에 최초로 어머니 나무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숲을 개별 나무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사회'로 보게 만들었다.
이 발견 이후 생태학은 개별 종의 생존보다 '관계'와 '연결성'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화 <아바타> 1편에서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 분)는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약탈하려는 셀프리지에게 숲의 가치를 설명하며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말하는 건 무슨 영적인 신념 따위가 아니야. 측정 가능한 데이터라고! 나무들의 뿌리 사이에는 전기화학적 통신이 이뤄지고 있어. 나무 한 그루가 주변 나무들과 맺고 있는 연결 고리는 인간 두뇌의 뉴런보다 많아. 판도라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뉴럴 네트워크(신경망)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판도라의 신 '에이와(Eywa)'가 단순히 미신이 아니라, 행성 전체의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생물학적 지성체임을 강조한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영화 속 이 내용이 상당히 탄탄한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수잔 시마드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아바타>의 숲 시스템을 설계했다. 실제로 시마드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나무들이 해충의 공격을 받거나 가뭄을 겪을 때 뿌리의 균근 네트워크를 통해 화학적 신호뿐만 아니라 미세한 전기적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은 실제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나무들이 정보를 저장하고, 자손을 식별하며, 환경 변화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현대 생물학에서 일종의 '군집 지능'으로 해석된다. 비록 인간과 같은 뇌는 없지만, 숲 전체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은 신경망의 작동 원리와 매우 흡사하다.
영화는 이를 '행성 전체의 의식'이라는 상상력으로 확장했다. 필자가 보기에 앞으로 우주 전체가 하나의 의식으로 긴밀히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밝혀질 것이라 판단한다.
그 뿌리가 되는 '지하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공유'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이 '우드 와이드 웹'은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영성적 통찰이 과학적으로 일차적으로 증명된 훌륭한 사례이다.
인간의 역사로 오면 공생의 원리는 더욱 극명해진다. 생물학적 조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날카로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빠른 다리도 없다. 만약 초기 인류가 각자도생 하며 무한 경쟁을 벌였다면, 우리는 벌써 멸종했을 것이다.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공간적 지능’이나 ‘도구의 사용’ 이전에 ‘협력하는 능력’에 있었다. 다윈 역시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에서 이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가장 이타적인 구성원이 많은 공동체가 가장 잘 번창하며, 더 많은 후손을 남긴다"라고 강조했다.
남을 돕는 마음, 슬픔을 공유하는 공감 능력,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도덕성은 진화의 부산물이 아니라,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가장 강력한 ‘적응 전략’이었다. 즉, 도덕적이고 협력적인 존재가 진정한 의미의 ‘적자(The Fittest)’였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번아웃, 우울증, 그리고 극심한 양극화는 모두 ‘경쟁이 유일한 생존 원칙’이라는 가짜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옆 동료를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고 믿지만, 생태계의 원리는 그 반대를 말한다. 공생하지 못하는 개체는 환경 변화에 취약해지고 결국 멸종의 길을 걷는다.
자본주의가 주입한 무한 경쟁의 논리는 우리를 끊임없는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공포는 우리를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 성과를 내는 기계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자연에서 경쟁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일시적인 과정일 뿐, 생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지속 가능한 공존’에 있었다.
다윈이 2026년의 우리를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아마도 자신의 이론이 ‘서로를 착취하는 근거’로 쓰이는 것을 보며 크게 탄식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관찰하며 모든 생명이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음을 역설했다.
경쟁사회는 환상이고 서로를 위하는 협력사회는 현실이 될 것이다. 나 홀로 승리하는 세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런 승리는 결국 고립된 파멸로 귀결된다. 진정한 의미의 진화는 ‘나’를 넘어 ‘우리’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승자의 자존심이 아니라 공생의 감각이다. 서로를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끌어안는 힘이 우리를 진화하게 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경쟁이라는 긴 악몽에서 깨어나 생명의 본모습인 ‘공존의 축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경쟁보다는 협력이 인간의 본능이다.
2022년 6월 29일 춘천에서 있었던 아래의 사례를 보자.
<경쟁보다는 협력이 인간의 본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