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의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
초희야, 며칠 전 너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것이 우연이었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만, 너에 관한 글을 읽는 내내 손끝이 아리고 가슴이 아렸다.
후세 사람들은 너를 가리켜 ‘불쌍한 여인’이라 칭하더구나. 내 알기로 ‘불쌍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하나는 안타까움이 극에 치달아 마음이 아플 때 터져 나오는 탄식의 말로 대상에 대한 애잔함이 짙게 배인 동정 또는 연민의 말이고, 하나는 사람의 습성이나 행태가 더이상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내뱉게 되는 비난의 말로 구제불능의 상태일 때 내뱉게 되는 포기 또는 체념의 성질을 갖는 말이다. 너를 향한 말을 굳이 나쁘게 해석할 필요까지야 없겠더라마는, 나는 싫더구나. 이 세상 여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마는 오십 보 백 보,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하루 세 끼에 매이고, 자식 낳아서 기르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느끼는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에 운명 지어진, 그 무엇처럼 벗어날 수 없는 그물 같은 것이더구나. 빠져나가 보려 아우성치고 발버둥 쳐봐도 삶과 죽음이라는 그물로부터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일 뿐이더구나. 그렇다고는 하나,
너를 ‘불쌍하다’고 하는 것은 세인들이 나를 모르고 너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이다. 너와 내가 살았던 ‘조선’이 나를 모르고 너를 몰랐던 것처럼 오백여 년이 흘렀어도 세상은 나를 모르고 너를 모르기 때문에 불쌍타커니 뭐한다커니 하는 것이지. 너는,
푸른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무지갯빛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은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시를 읊으며 스물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네가 즐겨 찾던 신선 세계로 총총이 걸어서 가더구나. 참으로 안타깝고 슬펐다. 가문이 기울다 보니 쇠락의 기운이 너에게로까지 미치는 모양이 처량하고 애닮았다.
초희 너는 1563년 명종 임금 재위기에 강릉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너를 가슴에 안았을 때 나는 몹시도 기쁘고 가슴 뿌듯했다. 전 부인에게서 난 삼 남매도 내게 보석이었지만, 너희 생모에게서 난 삼 남매 역시 내게는 가슴 시리게 뻐근한 보석들이었다.
네가 태어난 다음 해에 나는 ‘경주부윤’에 올라 탄탄대로의 길은 걸었고, 네가 다섯 살 되던 해에는 ‘대사성’에 올라 내직으로 가게 되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부러워하고, 누구도 내 집 대문을 함부로 넘겨다보지 못하던 때였다. 어디 아비뿐이었겠느냐. 너희 오라비들 역시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지. 우리 가문의 세도는 조선 팔도가 우러르며 존경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집안이었다. 특히 네가 여섯 살 되던 해에는 너의 아우 (허)균이가 태어났고, 이 아비는 명나라에 들어가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사’를 재수받기도 했지. 참으로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너는 참으로 영특한 아이였다. 너의 큰 오라비 (허)성이와 작은 오라비 (허)봉이는 미암 유희춘 선생에게 글을 배웠고, 너와 아우 (허)균이는 당대 최고의 문필가이자 진보적 사상가였던 손곡 이달에게서 글을 배웠다.
나는 사실 너에게 글을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는 용모도 수려하고 예의범절에도 어긋남이 없는 아이였고, 글을 읽어 해석하고 시를 짓는 데도 부족함이 없는 타고난 수재였다. 그러나 ‘여인’이라는 한계는 네가 뛰어넘을 수 없는 당시 조선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음모 같은 것이었다. 너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 간절해질수록 너의 영특함과 수려함이 가슴에 사무치게 아렸다. 네가 써 내려간 한시 중에
봉황이 단산굴에서 나오니
아홉 겹 깃무늬가 찬란해라.
덕을 보여주며 천 길 높이 날고
높은 소리로 산 동쪽에서 울어대네.
벼나 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네.
어쩌다 저 오동나무 위에
올빼미와 솔개만 깃들어 있단 말인가.
봉황은 성군이 세상에 나타나면 따라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새다.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지. 봉과 황이 단혈산에서 나와 대나무 열매를 먹고 오동나무에 깃든다 했지. 봉황의 머리 무늬는 덕(德)을, 등의 무늬는 예(禮)를, 가슴 무늬는 인(仁)을, 배의 무늬는 신(信)을 나타내는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했지. 그런데 너는 오동나무에서 봉황 대신 올빼미와 솔개만 보았구나. 네가 살던 조선 사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것일 게고, 너의 인생에도 절망뿐임을 아파한 것이겠지.
초희야, 너는 조선에 여자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음을 한탄했다지. 나는 ‘사위 자식 개자식’이라는 말은 접어두고라도, 다시 태어나도 너의 아비이고 싶구나. 어떠한 장벽이 가로막아도 너에게 글을 가르치고, 너의 포부를 펼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악습을 외면하지 않으련다.진실을 감추려들지 않을 것이다.
초희야, 내 딸 초희야, ‘불쌍한 여인’이라는 이름을 걷어치우고, 당대 최고의 문인 허난설헌, ‘빛나는 별’로 다 시 태어나자꾸나. 너는 나 초당 허엽의 금지옥엽 허난설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