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나는 노산군이오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을 읽고

by 윤슬

천만 리 머너먼 길에 고은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업셔 냇가의 앉쟈시니

져 믈도 내 안같아서 우러 밤길 녜놋다.


이것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나의 처지를 애닯아하며 부른 노래라오. 내가 수양 숙부와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같은 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한양을 떠나 영월 청령포까지 오는 오륙일 길에 나를 이끌고 왔던 금부도사가 한양으로 회정할 때, 떠나기 전날 밤 차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른 노래요. 그 노래 앞에 감개가 무량해짐을 뉘라서 알리요. 다만 내 죽음이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었음일 것이요. 왕방연 그 자는 내게 특별히 성은을 입은 일도 없소. 나를 위한 그 애태움이 공명을 바라는 자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데, 이런 노래를 부르다니, 내 어찌 그를 잊겠소.


정축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다시 내려왔소. 일 년 전 그가 부른 노래를 가슴 한편에 고이 접어두고 있었건만 금성 숙부마저 돌아갔다는 소식에 하룻밤을 목놓아 울고, 나를 지키려 애쓰던 시녀들과 내관들, 몇몇 선비들까지 각기 돌아갈 곳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히던 와중에 그가 왔다오.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있던 차에 백지로 봉한 작은 네모난 상자를 가지고 왔더이다. 그 자는 내게 차마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엎드려 울며 머리를 조아리는데, 밖에서 나장이 자꾸만 “유시오! 유시오!”를 외쳐대는데....... 나는 정작 사약을 마시지 않았소. 평소 나를 지키던 ‘공생’이라는 자가 등 뒤에서 갑자기 달려들어 활시위로 목을 졸랐소. 결국 한 많은 삶을 끝내고 말았소.


어찌하겠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는데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는데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는데...


나는 그렇게 돌아갔소.


나의 시신은 금강에 버려졌소. 왕방연 그 사람은 나의 시신을 그나마 보존하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다 하였소. 나의 시신이 물에 둥둥 떠서 흐르지 않고 하얀 열 손가락이 떴다 잠겼다 하는 것을 본 시녀들과 종자들이 뛰어들어 나와 함께 길을 갔소. 결국 영월 호장 엄흥도가 나의 시신을 거두어 평토장을 해 두었으니, 왕방연 그 사람이 있어 나의 초라한 생애가 그나마 의로울 수 있었다오.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이 한 몸 죽음이

충의에 있는 고로

현릉의 푸른 송백 꿈에서도 의젓하여라.


아, 그리운 사람, 성삼문. 그 사람이 마지막 가는 길에 읊은 시(詩) 라지.


삼문의 다섯 살 난 딸이 그 아비의 수레를 따르며 “ 아버지, 아버지! 나도 가, 나도 가요!” 발을 구르며 울 때 “오, 울지 마라 네 오라비들은 다 죽어도 너는 계집 애니까 살 것이다.”하며 종이 따라 올리는 술을 허리를 굽혀 받아 마시며 이 시를 읊었다지. 눈물이 나고 가슴이 울린다네. 나는 도대체 무슨 운명을 타고났기에 이다지도 고운 사람들을 고통 속에 보낸단 말인가!


아프다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다네. 현릉은 나의 부왕이신 문종대왕과 모후이신 현덕왕후께서 잠드신 묘역이라네. 그곳의 소나무가 꿈속에서조차 의젓하다니, 참으로 충신일세. 억조창생이 우러르며 칭송할 만하지 않은가 말일세.


성삼문, 그 사람은 내 할아버지이신 세종대왕께서 평생 정성을 다해 기른 조선의 보배였지. 내 아버지 문종대왕께서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셨던 학자였지. 내가 태어나던 날(세종 23년 1441) 첫가을 아침볕이 경회루 연당의 갓 피어난 연꽃에 넘칠 때, 자선당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내 할아버님과 성삼문, 신숙주가 함께 들었다더군. 너무도 고대하고 고대하시던 끝에 어렵사리 얻은 원손이었기에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셨다네. 그 해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하고 돌아온 데다 내가 태어났으니 그 기쁨이 오죽하셨겠나. 그에 할아버님께서는 전국 팔도의 죄인들을 대사면 하셨고, 삼문과 숙주에게 “경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나를 섬기던 충성으로 이 어린 손자를 섬겨 다오” 그윽한 눈빛으로 부탁하셨다네. 이에 숙주는 “상감마마, 성상을 섬기고 남는 목숨이 있다면 백 번 고쳐 죽어도 원손께 견마지력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하나이다.” 맹세했다네.


그러나 인심이라는 것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것이라는 것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 위의 글은 일반화된 지식과 더불어 춘원 이광수의 <단종 애사>를 참고하였습니다. 많은 부분 인용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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