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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처럼 글이 올 때

잘 잡아두어요

by 노사임당

몇 년 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대단한 주목을 받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외면당하지도 않은 채, 그러므로 성공적인 브런치 생활을 하고 있다. 너무 많은 분께 노출되어 완성형일 수 없는 글로 이불킥하지 않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아무도 오지 않았을 때 느끼게 될 소외감 역시 다독일 자신이 없는 나에게 그 또한 일어난 일이 아니므로 감사하다. 그렇게 참으로 적절하고도 적당히 성공적인 브런치 생활. 그 생활을 함에 있어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건 글을 읽어 주시는 분, 읽어 주실 분이겠다.


특히 고맙게도 내 글을 많이 읽는 사람이 있다.


그건 바로 나다. 나에게 감사를 전하며. 몇몇 꼭지는 만회 조회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각 개인을 모아 집계된 숫자일 뿐 한 개인이 내 글 중에 몇 개의 글을 읽었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아니다. 감사하게도 나중에 읽으려 '좋아요'부터 누른 분도 계실 테고, 어느 분은 읽었는데 깜빡 잊고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누가 내 글을 한 꼭지 읽었는지 혹은 10꼭지를 읽었을지는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공식 기록도 없는 마당에 그냥 하는 소리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나의 글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은 단언컨대(?) 나다.


부끄러워지려면 부끄럽기 참 좋은 말이지만 나는 내 글이 재밌다. 내가 썼지만 쓰고 싶을 때 후루룩 쓴 글은 제법 가독성이 있고 내 스타일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나에게 사랑 고백이라니. (당하는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이니 읽으시는 분들은 조금만 참아주시라. 곧 끝나리니….) 내 글의 독자임을 고백이나 하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지만 이 의견을 밝히지 않으면 이어갈 수 없으니 양해 바랍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임혜지 작가는 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가 쓴 글을 즐겨 읽는다. 두고두고 문장을 손보고 다듬는 재미도 재미지만, 마치 남의 내면을 훔쳐보듯이 그 글을 썼던 당시의 내 심리를 엿보는 맛도 새삼스럽다. 나도 내가 써 놓은 글을 보며 그 당시의 내 상황을 상상하며 키득거리기 일쑤다.



처음 글을 쓸 때는 끝도 없이 글감이 떠올랐고 수없이 흘려버릴 만큼 흔하게 존재했었다. 오래전은 아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달라짐을 느낀다. 처음에 쓰던 글처럼 수다 같고 일기 같은 글을 지양하려고 하는 방향 때문일 수는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고민해 보려 하니 글이 자주 도망을 간다. 몇 줄만 쓰다 만 글들이 쌓이기도 한다. 게다가 내가 쓰는 글이라는 게 감정처럼 스치는 것들이라 공식처럼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운전 중인 상황에서 떠오른 문장을 집에 도착한 뒤에 꺼내려 하면 그 당시에 떠올랐던 그 문장으로는 다시 적을 수가 없곤 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도 같은데 임혜지 작가도 이런 경우를 자주 겪는다고 말한다.


나는 독일어로 작문하다가 실수로 글이 지워지면 암만 많은 양이라도 그대로 다시 쓸 수 있지만, 한글로 썼던 글은 도저히 재현할 수 없다. 다 커서 배운 독일어는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뇌의 한 부분에 저장되어 있고, 최초의 언어인 한국어는 뇌의 좀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글 쓰는 당시의 순간적인 감성이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진단한다.


그런 연유로 얼마 전 문학상에 제출할 에세이를 실수로 삭제한 후 -살릴 수 없어- 엉뚱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비단 문학상에 내려던 글뿐만이 아니다. <댓글부대> 장강명 작가는 영감이나 글은 또 떠오를 테니 잠에 들려다가 일어나거나 운전하다 차를 세우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책 한 번 써봅시다)에 썼지만 나는 그 말이 맞기도, 틀리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장강명 작가의 글은 이성의 부위를 많이 사용하는 '기자' 글쓰기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칼럼처럼 논리적 배열을, 이성적이고 잘 맞아떨어지는 글을 생산해 내는(그것뿐만이 아니지만) 장강명 작가는 과거 기자 생활로 다져진 글 근육을 잘 사용한다. 아름답거나 번뜩이는 문장 하나보다는 전체 글의 구조적 단단함과 사실에 기반한 그럴듯한 허구적 글(소설)을 위해 자료 조사에 많은 부분 공을 들인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 나오는 문장이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에서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가마니는 그 시대에 있지 않던 단어) 때문에 집중이 흐트러졌다던 어느 책 속 문장(말밑 꾸러미 사전)처럼 잘 읽히는 글은 사실에 그 뿌리를 두었을 때라는 말이 힘을 받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칼의 노래가 잘 읽히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옵니다. 그저 떠오른 문장이 이것 뿐이라...)


단단하고 구조적인 글보단 감정에 기대는 글을 쓰는 편인 내게 장강명 작가식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게으른 자의 자료 조사도 어렵긴 마찬가지고. 김영하 작가는 <김영하의 인사이트 다다다>에서 너무도 많은 인용을 보여주며 방대한 글 읽기로 준비된 자료를 펼쳐 보여준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작가의 자료 조사와도 같은 인용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위안하자면, 에세이란 꼭 김영하 작가식 인용의 바다일 필요도 칼럼 같은, 사실에 입각한 논증적이고 귀납적이어야 하는 글은 아니라는데 있다. 그러니, 그저 문장 하나를 붙잡고 밤을 새워도 좋고, 일기 같은 글이어도 또 좋으며, 신세 한탄도, 오늘의 슬픔을 토해내는 혹은 화를 뿜는 성토의 장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고 공감이 필요하다. 그건 꼭 내게 건네는 위로와 위안보다 당신의 아픔이나 나의 실수로 저절로 건네어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너)만 그런게 아니야" 식 위로 말이다.



떠오른 문장이 하나의 촛불이 되어 당장 발 앞을 밝혀준다. 그 약하면서도 강한 촛불에 의지해 지하로 내려가는 나는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떠나는 탐험가다. 오늘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글을 보기 위해 또 촛불에 의지해 지하로 내려가 본다. 내 글이 오늘 내 마음에 들면 좋겠다. 욕심을 내자면 당신께도 말이다.



왼)의령 부자 바위라는 솥바위 찬조 출연 내 딸들. 오)문형배 작가님의 북토크~~크 좋다 좋아.

오랜만에 그림 들고 현장으로(참고로 제 팔은 아님ㅋㅋ)

둘째 열이 40도까지 가는 바람에 한 주? 두 주 쉬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감기 중. 곧 글로 그림으로 돌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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