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한 번째 겨울 6

그때가 더 행복했다

by 그런 날

어머니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신조어로서 그 단어가 일상적으로 쓰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다.

아흔 살이 넘은 어머니로선 행복하다란 단어를 직접 말로 사용하기엔 왠지 간지럽고 어색할 것이다.

그저 그때가 좋았지라고 할 뿐이다.

서툰 기록자에 의해 구어체가 글로 옮겨질 때 맛깔스러운 맛은 사라지고 그저 흔한 표현만 남는다.






그들 처음 혼인하였을 때 그들의 재산은 옥수수 서 말이 전부였고 농사 부칠 땅조차 없었으나 노력과 성실로 논과 밭을 조금씩 장만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근처에 세 칸짜리 초가집도 장만하였다. 삼 년 터울로 아이들도 태어났다.


"쌀농사를 지었지만 쌀밥을 먹어본 일이 없어. 맨 옥수수에 보리쌀 좀 넣고 감자 넣어서 그것도 배부르게는 못 먹고 겨우 때만 에웠지. 그래도 농사 지어 팔면 돈이 생기니까 그 돈으로 땅을 한 뙤기씩 늘리는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어."


살림이 늘어날수록 할 일도 늘어났다.

이른 새벽 눈을 떠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집안일과 양육과 농삿일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하루를 채웠다

농사는 대부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품앗이로 하거나 품을 사서 해야 했다. 그로 인한 어머니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점심과 새참 준비였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불려놓은 콩을 맷돌에 갈아 아궁이에 불을 때어서 두부를 만들었다. 사나흘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짬 날 때마다 산에 올라 산나물을 해 왔다.

취나물, 곤드레, 잔대싹, 두릅, 곰취, 고사리...

그 외에도 나는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는, 대대로 먹어온 수많은 산나물들 봄 내내 뜯어서 데치고 먹고 말리고 저장하고를 해마다 반복했다.


이 글을 쓰며 그러한 먹거리 채집과 가공과 조리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웠을까 하는 생각을 뒤로하고 다만 나는 생각한다.

그 음식을 한 번만 먹어볼 수 있다면....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가마솥에 끓여 만든 건강하고 꼬수운 두부와 야생에서 햇볕과 산의 기운만으로 자라 엄마의 손맛이 더해진 향긋한 자연산 산나물 무침은 얼마나 맛있을까!!

이제는 콩농사도 짓지 않고 가마솥도 없고 산에서 야생 산나물을 올 수도 없으니 다 틀렸다.


어머니의 중요한 임무 중 또 하나는 수시로 장에 가는 일이었다. 두부도 막걸리도 다 집에서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고등어나 새치 같은 생선도 있어야 했고 새참으로 내갈 국수도 필요했다.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머리엔 옥수수나 콩을 이고 잰걸음으로 삼십 리 산길을 걸어 진부장에 갔다. 에 현금은 귀했기 때문에 부분의 거래는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무거운 곡식을 이고 가야 했다.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뻥과자라도 사다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 마음을 힘겹게 누르고 어머니는 필요한 물건만을 사서 바삐 돌아왔다.

장에서 돌아오면 쉴틈도 없이 밭에 가서 김을 매야했다. 아기를 밭둑에 눕혀놓고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며 풀을 뽑고 돌아와서 흙투성이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어머니의 하루는 무척 길었나 보다.

김을 매곤 서둘러 돌아와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와서 불을 때 가족들에게 저녁밥을 해 먹였다. 그러고 나면 잠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밤엔 무거워진 눈꺼풀을 안간힘으로 올리며 길쌈까지 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헤아려보면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고작 이십 대 중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었다.

그 어린 아낙이 억척같은 생활력으로 자식을 낳아 키우며 얼음물을 깨서 기저귀를 빨고 맨발로 산길을 걸어 장에 가고 맨땅에 아기를 눕혀놓고 콩밭을 매었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삶이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에 하루를 오롯이 바쳐야 하는 삶이며 육체의 고통과 투쟁하는 삶이었다.


그러함에도 때때로 정다운 이웃들과 유쾌한 농담을 나누거나 농사일을 하며 흥겨운 농가를 부르거나 어떤 밤엔 누구네 안방에 모여 앉아 윷놀이를 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술이 익으면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아이들 편에 편지 배달을 보냈다.

"술이 익었으니 자시러 오시오"

그들은 어쩌면 꽃나무 가지 꺾어 수놓고 마셨으리라..



"사람이 아니었어. 짐승이나 매 한 가지였지. 소맨키로 살았다니까.

그래도 생각해 보면 지금 보담 그때가 더 재미났어. 요새 세상은 뭐가 많기도 많지만 그땐 뭐가 없기도 없었지만 왜 그리 웃을 일이 많던지.."




솔봉의 초가집에서 마지막으로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국민학교와 점방이 있는 아랫마을의 단정한 기와집으로 이사를 했다.

주거환경은 더 좋아졌지만 여전히 오지였고 전기는 그 후로도 오 년이 더 지나서야 들어왔다.

이웃엔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대체로 점잖았으나 때론 마을의 농군들과 다름없이 그들끼리 엉켜 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마솥에 밥을 지어야 하는 농사적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몰려와서 우리 엄마 밥을 먹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이 마을에서 시작된다.

그곳이 나에게는 고향이며 그곳에서 살았던 7년이 내 모든 추억의 부피보다 더 크다.

나는 그곳의 냄새와 색깔과 어느 아침의 안개까지 다 기억한다.

뒤란에 피어있던 노란 호박꽃과 엄마의 화단에 핀 빠알간 달리아꽃, 오이의 청량한 내음새, 아직 덜 녹은 언 땅에서 솟아오르던 초봄의 냉이와 달래들, 비 오는 날의 흙냄새, 집 앞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

정겹고 소박한 주변 마을의 이름들도 떠오른다.

솔봉, 너래, 싸리재, 핏대골, 도람, 큰터, 납작골, 황새베루, 가시머리.....


나는 이 모든 것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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