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살면서 아프다는 건

WEEK8 [8/4-8/10]

by 시옹

8/4 월, 오늘이 모여 미래가 된다

아직 잘 살아있는 식물들

99.9% J(계획형)인 나는 자꾸만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대한 틀을 짜려고 한다. 분명 최근 몇 년 간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대한 계획을 실행가능한 행동들로 쪼개고, 그 행동들을 실천하는 것이 내 삶의 큰 원동력 중 하나다. 브런치를 쓰며 책 발간을 꿈꾸고, 영상편집을 하며 유튜버를 꿈꾸고, 숏폼 영상을 만들며 인플루언서를 꿈꾸고, 운동을 하며 예쁜 몸을 꿈꾼다. 그렇기에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꿈을 포기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꽤나 가혹한 삶이다. 2년 전 모교에서 받았던 상담에서 상담사는 나에게 "어깨 위에 냉철한 감독관이 있는 것 같다"며 스스로에게 너무 무자비한 것 같다는 코멘트를 했었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론 그럼 왜 살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나는 나를 알기에 하루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부여하진 않는다. 그래서 해내지 않았을 때 나의 게으름과 부족한 면이 더 도드라진다.


생각이 많아져 서두가 길어졌지만, 말레이시아살이 8주 차 월요일에는 장을 보러 갔다가 운동을 했다. 장을 보러 가서 약 3만 원어치 정도 식료품을 샀는데, 6끼 정도 먹으면 한 끼당 5천 원 꼴이다. 식료품 물가가 확실히 저렴하긴 하다. 계란 15구가 11.7링깃(약 3800원), 바나나 한송이(6개)가 8.2링깃(약 2700원), 닭가슴살 350g이 11.63링깃(약 3800원), 참치캔 150g이 7.7링깃(약 2500원) 정도니 한국의 0.7배 정도 되는 것 같다.

큰 마음먹고 피코 데 가요(Pico De Gallo)를 만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멕시칸 생살사 샐러드인데, 생각보다 간단했다. 토마토, 양파, 고추, 고수를 썰여서 라임즙과 소금에 버무리면 끝! 내가 원하는 재료를 사서 신선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것 또한 참 감사한 일이다.


8/5 화, 요리 못하는 사람의 특징

오늘은 방울토마토로 바질 토마토 절임을 만들고, 나와 Ray님이 저녁으로 먹을 카레를 했다. 분명 크게 어려운 스킬 없이 썰기만 하면 되는 요리를 했는데, 왜 이리 힘이 들었는지. 요리를 못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요리를 해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이것도 하다 보면 발전하나..?

놀랍게도 우유가 벌써 상해있었다. 유통기한은 분명히 8월 11일까지라고 적혀있는데, 역시 말레이시아도 우유 사정은 좋지 못한 것 같다. 필리핀 세부에서도 신선하고 맛있는 우유를 못 먹어서 한이 서렸었는데, 말레이시아도 동남아라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나 보다. 그래도 세부보다는 우유가 다양하고 먹을만하다! 작은 우유를 사서 한 번에 다 마셔야겠다.

그리고 뭐가 문제였을까. 분명 상한 우유는 버리고 새 우유로 카레를 만들었는데... 나와 Ray님 모두 내일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8/6 수, 말레이시아살이 첫 아픔

찢어질 듯 아픈 배를 부여잡고 알람보다 먼저 일어났다. 이런 고통은 필리핀에서 익지 않은 닭을 먹고 식중독 걸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연신 신음을 뱉으며 간신히 출근 준비를 했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아픈 날 버스앱 MyRapidPULSE에 버스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7분을 걸어서 회사에 도착.

어제 먹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나 보다. 평소에도 위와 장이 약한 나는 위염/장염 중 하나에 걸린 것임을 바로 알아챘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먹고 아프니까 더 어이가 없다. 덩달아 Ray님까지 아프게 해서 너무 민망하고 미안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병가를 낼 수는 없는 법. 쥐어짜는 고통에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를 삼키며 5시까지 버텼다. 점심에는 회사 근처 암팡 포인트(Ampang Point) 몰에 가서 수선을 맡겼던 이불커버를 찾고 10링깃짜리 시계도 샀다. 암팡 포인트 몰은 사실 근처 사는 것이 아니면 갈 일이 없는 쇼핑몰이다. 한물 간 아울렛 느낌, 폐업 전 대구백화점 느낌이 난다. 하지만 싼값에 물건을 살 수 있어서 나에겐 회사 근처에 있어서 참 고마운 쇼핑몰이다.

이케아(IKEA) 이불솜의 치명적인 단점은, 퀸 사이즈 이불솜 면적이 2m*2m라는 점이다. 보통 시중에 파는 이불커버는 모두 2m*2.3m(가로*세로)라서, 이불커버와 솜을 한 번에 이케아에서 사지 않는 이상 이불커버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알았으면 이불솜을 이케아에서 사지 않는 건데, 뒤늦게 알아버렸다. 한국에서는 싱글 침대에서 팔도 다 뻗지 못하며 잤던 것을 생각하면 배부른 고민이긴 하다.

아침으로 만들었던 오나오를 저녁으로 대신 먹었다.

집에 와서도 위경련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저녁을 거르고 지쳐 잠들었다가, 8시 반 정도에 일어나서 페로제도 하이랜드 소 숏츠를 만들었다. 아프니까 더욱 비관적이고 우울한 생각들이 나를 점령했다. 이대로 차별성 없이 영상 제작을 하다가는 평생 유튜버 호소인만 하다가 늙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몸이 약해지다 보니 악몽도 꾸었다. 바퀴벌레와 쥐가 가득한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 꿈과 내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비웃기만 하는 꿈.


8/7 목, 노동자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배가 어제보단 덜 아팠다. 그래도 멀쩡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회사는 가야 하기에 관성적으로 출근준비를 했다.

점심으로 몽키아라 쪽 Dubu Dubu Restaurant 한식당까지 가서 배아픔을 무릅쓰고 순두부찌개를 먹었는데, 아는 맛 그대로 맛있었다. 한식치고 가격도 착해서 두부 먹고 싶을 때 추천!

그런데 슬픈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나… 음식을 먹으니 배가 점점 더 아파오기 시작했다. 위 한가운데가 쪼이고 쓰리면서 숨쉬기 어려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프다고 일을 안 할 수 없다. 오후에는 미드밸리 쪽에 있는 삼성전자 말레이시아 지점에 가서 미팅을 했다. 빌딩이 겉만 번지르르한 게 아니라 내부도 한국과 같이 깔끔해서, 정말 동남아 같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 오기 전에 살았던 필리핀 세부는 멀쩡해 보이는 건물 안에서도 바퀴벌레가 그냥 나왔었는데. (아얄라몰 포함) 말레이시아에서는 벌레 걱정을 좀 덜해도 돼서 편하다.


8/8 금, 결국 파업

결국 몸이 파업했다. 배가 계속 아파서 아침에 결국 병가를 냈다.

전에 한국 방송국에서 일했을 때는 병가 같은 제도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병가는 몇 달간 입원을 할 때나 쓰는 거였다. 아프면 연차를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한국 회사는 병가 제도가 있다. 월급의 60%만 받는 병가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병가를 막상 내고 나면 불안이 몰려온다. 병가를 낼 만큼 아픈 게 맞나? 나중에 진짜 더 아픈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마치 죽을병이 아닌데 119에 전화한 것 같은 초조함이랄까. 위염인지 장염인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배아픔이 왔다 갔다 했다. 부탁도 안 했는데 직장 동료 H가 죽을 집까지 시켜다 줬다. 이걸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감개무량했다. 마이타운(MyTown) Canton Boy라는 중식 프랜차이즈의 곤지(porridge)였는데, 한국죽보다 훨씬 간이 되어있고 그래서 당연히 맛있었다. Salted Egg 닭죽 추천!

세부 새해 폭죽 숏츠를 만들고 나서도 심심해서 <Burn After Reading>이라는 블랙코미디 영화를 봤다. 2009년에 나온, 브래드 피트와 조지 클루니 등이 나오는 비급영화인데, 나쁘지 않았다.


8/9 토, 재난 영화의 날

찝찝하게 시작한 주말. 아파서 어렵게 얻은 근육이 다 없어질까 두려워 간단히 운동을 했다.

나는 우울해지면 재난영화를 본다. 오늘은 <월드워 Z>부터 시작해서 <우주전쟁>, <라이프>까지 재난/스릴러 영화를 세편이나 몰아봤다. 노트북을 수리 맡기는 바람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눈여겨보고 있었던 Shein이라는 옷쇼핑어플(브랜디와 비슷)에서 드디어 옷을 사보았다. 퀄리티는 배송받아본 후 후기를 남기겠다.


8/10 일, 주말 근무

말레이시아 일하면서는 주말 근무가 꽤 잦다. 모두 초과근무로 인정되어서 돈은 받지만, 주말을 온전히 내 것으로 즐길 수 없는 건 여전히 짜증 나는 일이다. 덕분에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의 Dewan Filharmonik PETRONAS에서 오케스트라 공연도 봤다.


함께 출근해서 고생한 동료 H의 저녁 약속에 따라갔다. 다른 한국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갑 한국여자분을 만나서 인사도 하고 얘기도 나눴다. 수리아팔계옥에서 숯불닭구이를 먹었는데, 2인분에 닭전만 시켰는데도 여자 셋이서 충분히 배불렀다. 물론 세명 다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닭전은 남길 정도로 배가 불렀다. 소스도 맛있고 가격도 한식당치고 비싸지 않아서 다시 가볼 만한 것 같다.

집에 와서는 주말이 가는 것이 아쉬워 애플TV에서 <인터스텔라>를 대여해서 새벽 1시까지 봤다. 넷플릭스는 은근히 영화가 정말 없다. 점점 더 오리지널에 투자하면서 영화 수급률이 더 떨어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인터스텔라를 이렇게 작정하고 본 건은 2014년 개봉 당시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어제 개봉한 것 같이 감각적인 영화였다.


다음 주는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한 한 주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