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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pr 02. 2023

아레카야자수

 나의 작은 정원

 아침 기상 시간은 일정치 않다. 새벽 4시 반을 전후로 들쑥날쑥이다. 취침시간이 규칙적이지 못한 탓이다. 시간에 상관없이 커피라도 한 잔 즐긴 날이면 영락없이 얕은 선잠에 뒤척인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피천득 님의 수필 한 구절을 떠올리며 혼자 슬그머니 웃음 짓는다.

ㅡ새해에는 잠을 설치더라도 향긋한 커피 한 잔을 즐겨 마실 것이다. 미끄럽더라도 털신을 신고 눈길을 걸어 볼 것이다.ㅡ

 노년에 쓰신 작품으로 대강 이런 내용으로 기억된다.


 11시 전후로 잠자리에 들자고 마음 먹지만 12시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다. 노년에 접어들수록 충분히 자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생활이 건강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들 강조한다. 이 둘 다 잘 지키지 못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좋아서 선택한 일이고 해야 하기에 받아들인 일상이다.


 독립한 주체로서 가족 형성, 확장,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누린 것들, 얻은 것들, 해내었던 일들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훨씬 가치가 높고 소중하다.

 이제 점점 규모는 축소되고 내용은 빈약해지는 세월을 맞이할 테지만 그건 아주 당연한 자연의 섭리다. 봄, 여름, 가을의 시간들을 지나 이제 겨울로의 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생존을 꾀하는 효율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잎이 떨어지면 떨궈야 하고 추워지면 몸을 움츠려야 한다.


 조금은 더 풍성하게 남아 있고 조금은 덜 움츠려도 되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좋은 때이다.

 내가 하고 싶고 남에게는 피해가 안 되는 일에 정성 쏟으며 선택과 집중에 깨어 있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발길 가는 곳이 소박한 화분들로 가득 찬 작은 베란다이다. 어느덧 4월로 접어드니 봄기운 가득 담은 바깥세상이 벌써 어슴프레 밝아 온다. 따로 불을 밝히지 않아도 화초들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밖은 점점 더 환해진다. 잠에서 깨어난 새소리들깜짝 놀란 듯 급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미세 먼지 자욱한 바깥 날씨에 베란다 중문만 열어도 거실에 놓여 있는 공기 청정기는 초록에서 주홍으로, 뒤이어 새빨간 적색으로 바뀌며 경계경보를 알려온다.

 볼 수 없는 미세먼지에 대한 두려움보다 싱싱한 초록이 뿜어내는 생명력의 유혹이 더 강렬하다. 중문을 드륵 열고 베란다로 들어선다. 똑같은 자리, 비슷한 시간에 매일 대하는 익숙한 것들이지만 언제나 새롭고 다정하다.

 눈길 가는 대로 마음을 준다. 화분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사연과 역사까지 긴 이야기가 이어진다.


 키가 큰 탓에 제일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아레카야자수. 커다랗게 활짝 펼쳐진 넓은 잎사귀 사이로 계속 솟아오르는 여린 새잎들이 어우러져 화분은 무성하다 못해 빽빽하다. 협소한 공간에서 우아한 제 자태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환기불량 때문인지 하얀 솜 같은 작은 벌레 녀석들이 어느새 또 야자수 잎사귀 앞뒷면을 하얗게 잠식해 다. 이제 막 벌어지려는 여린 잎을 특히 많이 공략한다.

 바로 옆에 놓여 있는 오래된 호야 잎 뒷면에도 들깨처럼 생긴 갈색점들이 찰싹 들러붙어 있다.

 흰솜깍지벌레와 개각충.

 최대한 많이 잘라내 버리는 과감한 가지치기와 친환경 살충제를 3일 간격 3회 뿌리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두 가지 방법을 다 무시하고 수시로 한 잎 한 잎 깨끗하게 닦아낸다. 일회용품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럴 때는 물티슈가 아주 유용하다. 오래전 아이들이 쓰다 남긴 물티슈가 비닐 포장지 속에서 바싹 말라 있다. 물에 적셔 아레카야자수의 기다란 잎사귀 앞뒷면을 하나하나 훑어내리며 닦아낸다. 단단한 호야 잎도 뽀독뽀독 앞뒤를 닦아준다. 물티슈는 얼룩덜룩 지저분해지고 잎들은 반짝반짝 생기를 띤다. 시간이 화살같이 지나간다.

 아레카야자수와 함께한 시간도 그렇다. 어느새 10년 가까운 긴 시간이 흘렀다.


 미세먼지라는 낯선 단어가 일상생활의 화두로 언급되기 시작한 때였다. 섬세한 아들이 공기정화식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인터넷으로 덜렁 신청한 것이 이 아레카야자수다. 인터넷으로 화초를 구입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택배 포장으로 배달된 크기가 상상 이상으로 거창했다. 손잡이도 없이 매끈하게 빠진 깊고 둥근 화분에 심어져 있는 키 큰 야자수. 무게도 부피도 처음에는 꽤 부담스러웠다.  

 식물을 가꿀 줄도 모르고 가꿀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학업과 실습에 쫓기는 아들이 공기정화식물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둔 마음을 알기에 정성을 들였다.

 함안까지 내려간 1박 2일 장거리 이동을 포함하여 네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다행히 큰 손상 없이 함께해 왔다.


 결혼을 하여 새롭게 꾸린 자기 가정에서도 여러 번 식물 가꾸기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아들네다. 빈 화분만 늘어난다. 우리 집 아레카야자수만이라도 끝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잘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

 환기가 잘 되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공기정화의 사명을 뽐낼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찾아주어야겠다. 단정하게 이발도 좀 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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