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받은 약을 왜 또 감시할까?

완벽하지 않은 임상시험, 그리고 리얼 월드에서의 질문들

by 디딤돌

신약이 식약처의 허가를 받았다는 뉴스가 뜨면,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안전하고 효과적인 약이 나왔구나"


개발에만 10년이 걸렸고, 수천억 원을 들여 임상시험까지 통과했으니 당연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약물역학을 하는 사람에겐 "허가"는 끝이 아니라 거대한 시작일 뿐입니다.

오늘은 RWE/RWD 기술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왜 이토록 시판 후 약물을 추적해야 하는지, 그리고 한국의 안전관리 제도가 왜 "재심사(PMS)"라는 긴 터널을 지나 "RMP(위해성 관리계획)"로 진화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1. 임상시험은 왜 '완벽한 온실'일까

허가의 핵심 근거가 되는 3상 임상시험은 과학적으로 가장 엄밀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 세계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완벽한 온실"이기도 합니다.


1) 숫자의 한계

3상 시험(RCT)에 참여하는 환자 수는 보통 1,000~3,000명 수준입니다. 1만 명 중 1명에게만 생기는 희귀한 부작용은 이 규모로는 거의 잡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드물지만 치명적인 중증 피부반응이나 특수 조건에서만 나타나는 심각한 부정맥 같은 사건들은 RCT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대상의 한계

노인, 임산부, 중증 신부전/간부전 환자, 다약제 복용 환자 등은 "안전상의 이유로" 시험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가 당시 근거의 상당수는 사실상 '비교적 건강한 중년 성인 (상대적으로)"을 대상으로 한 결과인 셈입니다.


3) 환경의 한계

임상시험에서는 연구 간호사가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약 복용 여부를 확인하고, 정해진 스케줄대로 검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상 징후가 보이면 즉시 조치가 취해지죠.

하지만 약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이런 통제된 온실은 사라집니다. 약을 깜빡하는 할머니, 술을 마시고 약을 먹는 직장인, 서너 가지 약을 함께 먹는 만성질환자들이 이 약을 처방받기 시작합니다.



2. 재심사(PMS): "한국인에게도 안전한가?"

1990년대 도입된 한국의 '신약 등의 재심사 제도(PMS)'는 이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서양인에게 안전하다고 한국인에게도 안전할까?"


대부분의 신약이 서양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발되던 시기였고, 인종간 차이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그래서 허가 당국은 제약사에게 숙제를 내렸습니다.


'허가 후 4~6년 동안 한국인 환자 600~3,000명에게 약을 사용해 보고, 그 결과를 가져오세요.'

이 제도는 "한국인에서의 초기 안전성 데이터"를 확보하는데 꽤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 채우기"식 조사가 반복되고, 단순 빈도 나열에 그쳐 "이 약의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답을 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명확해졌습니다.



3. RMP: 위험을 알고, 감시하고, 줄이기 위한 설계도

이 한계를 넘기 위해 유럽(EMA)에서 시작된 'RMP(Risk Management Plan, 위해성 관리계획)'의 핵심 아이디어는 단순합니다.


"모든 약은 위험하다. 중요한 건 그 위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관리하느냐 이다."

단순히 증례를 모으는 게 아니라, 약의 특성을 고려해 위험을 관리할 계획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RMP는 보통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됩니다.


1) Safety Specification - 무엇이 위험한가?

이 약과 관련해 알려진 위험(Identified risk)과 잠재적 위험(Potential risk), 그리고 정보가 부족한 영역(Missing information)을 정리합니다.

예: 이 약은 간 독성 위험이 있으며, 임신부 안전성은 아직 모른다.


2) Pharmacovigilance Plan - 어떻게 감시할까?

정리한 위험을 어떻게 관찰할지 계획합니다

예: 간 수치 변화를 보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건강보험공단 코호트 연구를 수행한다.


3) Risk Minimisation Plan - 어떻게 줄일까?

실제로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적습니다

예: '기저 간 질환 환자에게는 처방 금지 경고 문구를 넣는다.'


4. 숙제 검사에서 과학적 탐구로 (재심사 -> RMP)

한국도 이제 이 글로벌 흐름에 합류합니다. 25년부터 제심사 제도가 폐지되고 시판 후 안전관리가 RMP로 일원화됩니다. 방향성은 명확합니다. "행정적 숙제"에서 "위험관리(과학적 탐구)" 의 전환입니다.


그렇다면 RMP는 어떻게 수행될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1) 전통적인 접근: "여전히 유효하지만, 무거운 방식"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방식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를 전향적으로 등록하고, 증례기록서를 통해 수집하는 '시판 후 조사' 형태입니다.

새로운 혈액 검사나 특수한 모니터링이 필요해서 기존 데이터에는 없는 정보를 얻어야 할 때, 이 방식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RMP가 요구하는 질문이 복잡해질수록, 이 방식으로 환자를 일일이 모으는 것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고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집니다.


2) RWE/RWD의 활용: "이미 있는 데이터에서 답을 찾다"

여기서 바로 RWE/RWD가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굳이 1만 명을 새로 모으지 않더라도, 이미 쌓여 있는 수천만 명의 데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적인 조사로는 답하기 힘든 거대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RWE가 RMP의 핵심 도구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RMP의 본고장인 유럽과 미국에서 실제 데이터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사례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5. 참고문헌(Reference)

약사법

의약품의 위해성 관리계획 가이드라인

신약 등의 재심사 기준

European Medicines Agency (EMA). Guideline on good pharmacovigilance practices (GVP) Module V – Risk management systems (Rev 2). EMA/838713/2011.

U.S.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FDA). REMS: FDA’s Application of Statutory Authorities to Ensure That Benefits of Drugs and Biological Products Outweigh Risks. 2019 Draft Guidance.

Strom BL, Kimmel SE, Hennessy S (eds.). Pharmacoepidemiology, 6th ed. Wiley‑Blackwell, 2019. (Chapter on Postmarketing Surveillance).

Park BJ. The History and Future of Post‑marketing Surveillance (PMS) in Korea. Journal of Pharmacoepidemiology and Risk Management. 2016;8(2):8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