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레퀴엠 EP #15

격랑 속의 나뭇잎

by 니콜라테스

이 글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회사, 단체, 지명,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일부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조고의 농단



2000년 3월 23일 저녁, 태산그룹 구조조정본부.


김태수 본부장은 며칠 전 상하이에서 날아온 이진수 부회장의 밀명을 곱씹으며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인사 파동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수립하라.’


그것은 형제간의 연을 끊고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겠다는 섬찢한 선언이었다.

김태수는 가장 신뢰하는 소수의 핵심 직원들을 따로 추리고, 회의실도 별도로 마련했다. 철저한 보안 아래 움직였다. 출입을 통제하고, 모든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진명기 회장 쪽에서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그룹 전체에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퍼져 나갔고, 직원들은 거대한 균열을 감지한 듯 동요하고 있었다. 태산이라는 성벽에 깊은 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복도와 사무실 곳곳에 맴도는 불안감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다. 전운은 짙은 안개가 되어 태산그룹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3월 24일 오전.


진명훈 회장은 출근하자마자 이진수와 김희규, 김태수를 호출했다. 팽팽한 긴장감과 답답함이 뒤섞인 묘한 분위기 속에서 김태수 본부장이 먼저 서류를 펼쳤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진명기 회장님쪽 핵심 임원들이 인사 발령 전 비밀리에 회합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즉, 저들의 도발은 미리 계획된 것이라는 반증입니다. 다만, 그들이 왜 이 시점에 전격적으로 강공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배후의 본질을 파악 중입니다.”


김태수는 보고 내내 이진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이진수가 지시했던 ‘태산자동차 합병 검토’가 이 사태의 방아쇠였다는 사실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것은 주군인 진 회장에 대한 충성심보다 이진수라는 괴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었다.

진 회장은 보고를 들으면서 옆자리의 이진수를 넌지시 관찰했다. 이진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서류만 쳐다보면서 듣고 있었다. 차가운 벽처럼 감정 없는 그 얼굴을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이 사람은 이 모든 파동을 이미 계산해 놓았던 것일까.’


그때, 김희규 사장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짜증을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아니, 인사권도 없는 사람들이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설쳐대는 겁니까?”


김희규는 왕 회장이 수십 년간 곁에 두고 자식처럼 아꼈던, 실력보다는 충심으로 태산건설 사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특히, 재무 분야는 김태수에게 전적으로 맡긴 채 자신은 관심도 없었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왕 회장에 대해서는 친자식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지극 정성을 다했다.


이진수는 그런 김희규를 속으로 무시하고 있었기에, 이번 사태의 내막 역시 일체 귀띔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김태수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이제부터가 진짜 본론이었다.


“이진수 부회장은 금융부문을 포함한 경영 전반에 걸쳐 회장님을 보필하고 있고, 특히, 현재 핵심 사업인 대북사업을 적극적으로 보좌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습 인사를 무효화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입니다. 회장님께서 태산증권의 법적 인사권이 있으시니 당장 실행하셔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


김태수가 잠시 말을 멈추고 이진수를 바라보았다. 이진수가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이자, 김태수가 말을 이었다.


“구조본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진명기 회장님이 현재 위치를 유지하시는 한 이런 독단적인 도발은 반복될 것입니다. 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고 그룹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서는…… ‘공동회장 체제’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 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형님을 내쫓으란 말이야? 꼭 그렇게까지…… 다른 방법은 없어?”


침묵하던 이진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공동회장 직위를 박탈하지 않으면 2차, 3차 도발을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단단히 못을 박지 않으면 언론은 형제간 경영권 분쟁을 대서특필하면서 연일 난도질해 댈 겁니다.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룹의 신인도가 추락해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면 대북 사업도, 태산의 미래도 물거품이 됩니다. 지금,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명예회장님의 재가를 받아 신속하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진 회장은 이진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동공이 뱀의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이 인간, 아버님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으면서 재가를 받으라고!’


진명훈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일어났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이진수 같은 인간이 있었기에 태산이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것을.


진 회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제 정상적인 대화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상태였다. 어떤 날은 과거의 예리함을 잠시 비추기도 했지만, 심할 때는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받아내야 하는 재가, 그것은 승인이라기 보다는 사실상 요식행위였다.


그는 이 상황이 치욕스럽고 슬펐다. 쇠락하는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권위마저 연출로 유지하려는 절박한 연극. 그의 가슴 한 켠에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또 다른 한 켠에서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진시황의 곁에서 권력을 농단했던 환관 조고의 간교함이 떠올랐다. '진시황의 유언을 조작해 황태자를 죽이고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웠던 희대의 간신…… 결국 그로인해 진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지.'

이진수 역시 아버지의 희미한 의식을 이용해 형제간 전쟁을 촉발하려는 야수의 심장을 품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진명훈은 그를 당장 쳐내야 한다는 본능적 경고를 느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현 시점에서 제거하기에는 그의 공백이 너무 컸다.


진명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현재의 상황을 해결해야했다. 태산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그렇게…… 합시다.”


진 회장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결단이었지만,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가고 있는 이의 체념이란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날 저녁, 진 회장은 태산병원 VIP 병동을 찾았다. 하얀 침대 위에 앉아 초점없는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는 거인의 왕좌에서 내려온 작고 초라한 노인에 불과했다.


“아버님, 그룹의 상황이 복잡합니다. 명기 형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진명훈은 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왈칵 솟구치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날 아침, 진 회장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차갑게 지시했다.


“보도자료 배포해. 진명기 회장을 공동회장에서 해임한다고.”


창밖에는 이른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지 낀 세상을 씻어내리는 비였지만, 진 회장의 마음속에 쌓여있는 죄책감과 불길한 예감은 씻어내지 못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나는 나뭇잎처럼 격랑 속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그 물길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승자의 환희일까, 패자의 눈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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