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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카 Stica Mar 29. 2024

결국은 모두의 이야기

<미국이 만든 가난>  - <Poverty, by America>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 미국에서 거주할 권리도 계획도 없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다. 더구나 사회적 이슈로서의 빈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이나 열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분명 내 일은 아닌데다, 직접 알고 깊이 관여해야 할 책임도 느끼기 어려운 키워드, "미국"과 "가난"에 대한 책.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저, 이 책이 처음 참여하게 된 독서모임에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따르는 언니가 초대해준 모임이라, 읽어야 할 책이 어떤 것이든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은 초장부터 그런 나의 무신경함을 꾸짖었다(혹은 스스로를 꾸짖게 만들었다). 덤덤하게, 그러나 정확한 문장으로.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삶이 별개라고 생각한다.  - 레프 톨스토이
We imagine that their sufferings are one thing and our life another.  




자본주의 사회의 리더로서 고소득 엘리트들이 모여드는 나라, 미국에는 놀랄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미국이 매년 상품과 서비스를 중국보다 5조 3천억 달러 더 많이 생산하고, 뉴욕 주의 경제가 대한민국의 전체 경제 규모를 능가하는 한편으로, 막상 그러한 거대자본 국가에 살고 있는 3800만 명 이상이 기본적인 생필품을 감당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200만명 이상의 미국인 집에는 수도나 양변기가 없다. 


그러나 작가는 숨겨져 있던, 또는 우리가 애써 보려고 하지 않던 가난을 조명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진심으로 가난이 종식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심"이 중요하다. 세상 어디에서든 길 가는 사람 아무나를 붙잡고 "가난의 종식을 희망하십니까?" 라고 물을 때 "아니오"라고 말할 사람은 아마 극히 드물테니. 반면에 "가난의 종식을 위해서는 A, B, C, D...X, Y, Z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 중에 C와 Y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C와 Y는 A, B, D ... Z를 연동하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고요. 동참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성인은 C와 Y가 본인과 가족에게 어떤 유불리를 의미하는지 따져볼 것이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계산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조차 꺼릴 지 모른다. 행동하지 않는 마음은 진심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책에서는 작가가 왜 가난의 종식을 진심으로 희망하는지, 그러한 진심을 왜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야하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며, 또 어째서 그에 동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도 되는지(않아야 하는지)를 풀어낸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크리스탈(Crystal), 훌리오(Julio), 우(Woo)와 같은 실존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차마 작가의 말을 끊고 책을 덮어버릴 수 없도록 붙잡아 둔다. 




빈민구호, 자원이 부족하다

이것은 잘 사는 나라 미국이기 때문에 더욱 명백한 착각, 아니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노골적인 거짓말이요 외면이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책에서는 소득구간별 유효세율을 파헤치며, 사실은 부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거대자본을 움직이는 기업들이 실제 기업운영이 이루어지는 지역에서 먼 곳으로 소득을 이전함으로써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상기시킨다. (페이스북이 신고한 아일랜드내 소득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아일랜드 소재 근로자 1명당 무려 천만달러의 기업소득을 창출하고 있다는 해괴한 결론이 나온다.)  


이미 걷은 세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살펴봐도 쓴웃음이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정된 재정의 상당부분이 실제로는 빈곤계층에 무관한 각종 정부 (심지어는 종교) 활동에 쓰여지고 있다. 2020년의 미국 복지재정 316억 달러에서, 가난한 사람들 수중에 들어간 현금은 71억 달러에 불과했다. 오클라호마는 소득수준에 상관없는 결혼 이니셔티브에 7천만달러 이상의 빈곤가정 일시부조 자금을 지출했으며, 메인은 무려 이 돈을 가지고 기독교 여름 캠프를 후원했다고 한다. 미시시피의 사례가 가장 흥미로운(웃픈)데, 미시시피주는 극빈층 가정에 배정된 재정을 교회 콘서트, 지역 비영리조직의 대표와 가족을 위한 차량 구매비용, 은퇴한 NFL 선수의 (하지도 않은) 연설 등으로 써댔다. 뿐만 아니다. 주정부는 빈곤가정일시부조 자금을 전액 지출해야 할 필요가 없어, 쓰지 않고 쌓아둔 경우도 허다했다. 테네시는 7억 9천만 달러의 자금을 오롯이 쌓아두고 있었단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멍청하다

빈민구호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정치인들은 주장한다. 구호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을 의존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이 한층 더 게으르고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게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실질을 살펴보면, 가난한 이들의 대부분은 "강제된 금욕 생활"을 한다. 책에서 인용된 캘리포니아 스톡턴(Stockton)시의 사회실험을 보자. 저소득층 주민 125명을 임의로 선정하여 조건 없는 500달러를 지급했는데, 그 돈은 대체로 식료품점에서 쓰이거나, 공과금을 내고 자동차를 수리하는데 쓰였다. 담배나 술을 구입한 금액은 1퍼센트 미만이었다고 한다. 


가난의 원인이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믿음은 아주 편리하다. 우리 삶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가? 착취에 가깝도록 싼 노동력이 제공하는 저렴한 상품과 서비스의 최종 수혜자는 누군가? 소비자다. 또, 기업이 노동력과 세금 비용을 절감하여 높은 영업이익을 발표하면 주가가 오른다. 최대 수혜자는 단연 해당기업의 지배적 소유주와 고위직, 고연봉 임원들이겠지만, 투자수익을 얻는 개인투자자들도 수혜자가 된다.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소비자로서, 주식투자자로서 기성 사회구조를 함께 지탱하며 고착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고 나는 착취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확실히 한국은 미국에 비해서는 노동자 권리보호가 나은 편이다. 당연히 어려움이나 장애가 없지야 않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노조활동들이 이루어지고, 땅덩어리가 작은 덕(?)에 최저임금이나 근로시간 등의 보장제도도 상대적으로 균질하게 운영된다. 그에 비해 미국은 (노조탄압 규제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노조 설립이나 운영이 힘들고, 대다수 주에서 서비스 근로자들에 대한 최저시급 이하 (subminimum) 급여가 허용된다. 연방 차원에서는 고작 시급 2.13달러가 최저선이 되는 것이다. 미국 식당에서 팁이 그렇게나 중요한 결정적 이유다. 


그렇지만 잘 따져보자.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정말 "착취"와 전연 무관한가? 나는 최저가 상품을 선호하는 "가성비" 추구 소비자이며, "우량주" 대기업 주식만 야금야금 사모으는 개미 투자자로서 경제사회에 참여한다. 그 뿐 아니다. 나는 어쩌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했을 지 모를 자금의 일부를 축내면서도 크게 고마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학자금 대출은 받은 적이 없지만, 몇년 전 남편이 서울 외곽의 작은 평수 아파트를 청약했고 당첨되었다. 정부가 얼마간의 이자를 보태주는 저금리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남편 소유이기는 하지만, 세대의 일원으로서 나 또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는 정부지원의 혜택을 누리는 모든 행위까지 "착취"라고 일갈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국가재정의 많은 부분이 공식적으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도, 실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활용할 수 없는 제도에 쓰인다는 점을 피력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진학과 자가(또는 전세) 마련이 그저 딴 나라 이야기일지 모르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영 가 닿을 수 없는 제도와 정책에 복지 자금 대부분이 쓰여진다면, 그러한 "복지"는 배타적이다. 그리고 배타적인 복지는 위선적이며, 기망적이기까지 하다. 가난한 사람들도 소득을 창출하고 세금을 내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으니까. 


나는,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만약 이 글의 단 한 문장이라도 당신에게 반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 또한 가난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 경우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속상한 대목이 있었다. 아마도 크리스탈(Crystal), 훌리오(Julio), 우(Woo)의 이야기가 공상과학 소설이라기보다는 나의 이웃, 내지는 친척, 심지어는 가족의 이야기로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특히 주당 80시간을 일하다가 실신한 훌리오(Julio)의 이야기는, 서울에서 입시학원 강사로 일하며 밤이면 학원 책상을 길게 붙여, 그 위에서 잠을 청했다는 젊은 시절 아빠를 떠오르게 했다. 아빠는 거의 평생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는데, 돈이 없어 시작하자마자 끊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름철 부수입을 벌기 위해 아이스케키 장사를 한 적이 있다. 팔리지 않은 아이스케키는 (본인이 부양하던) 미성년 조카들에게 갖다 주었는데, 아이스케키가 녹을까 노심초사하며 집까지 먼 길을 쉬지 않고 뛰었다고 한다. 동생 알렉산더(Alexander)가 "나랑 한 시간 노는 시급은 얼마"인지 물었을 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던 훌리오(Julio)의 일화가 더욱 가슴이 아팠던 이유다. 여름날 아이스케키를 손에 들고 달리는 아빠의 모습이 겹쳐 그려졌기 때문에. 본인의 가정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부양의 책임을 짊어진 청년,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으면서도 부족함을 느낄 때의 막다른 괴로움이 전해졌다.  


작가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을 인용한다.

"부정의는 어디에 있던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일한 운명의 의복으로 매듭지어진 채, 불가피한 상호성의 네트워크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because "we are caught up in an inescapable network of mutuality, tied in a single garment of destiny."

[공식 한국어본의 번역: "우리는 상호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네트워크에 갇혀 있고 단일한 운명의 옷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부정의는 어디에 있든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문제를 해결하기에 사회는 너무나 양분되어 있다

작가는 설파한다. 가난을 줄이고 (나아가 더 욕심을 부려) 종식시키는 일은 반드시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정계의 통념처럼, 목적이 뚜렷하다면, 목적 외의 구분을 허물고 사람들을 모아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예시이기는 하지만, 진보 성향의 민주당이 이제껏 얼마나 중산층의 이익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정책을 지지해왔는지를 봐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민권운동에서 백인 엘리트들이 공원과 공설 수영장의 인종 분리 철폐를 지지했던 것은 어차피 자기들은 그 공간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자기네 부유한 동네의 부지를 좀 더 포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법제를 변경하는 데에는 저항해 놓고 버스 통학제를 지지한 것도, 그들의 교외 동네까지는 버스 통학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질문한다. (정치적 진영을 막론하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경제가 부자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피해를 준다고 믿으며, 대다수는 부자가 자기 몫의 정당한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믿고, 대다수가 15달러 연방 최저시급을 지지하는데도, 어째서 미국내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정치인들이 그 뜻을 대변해주지 않고 있는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는 희망을 제시한다. 만약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빈곤의 경감과 종식을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목표로서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충분히, 작금의 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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