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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롬 Jun 18. 2024

아끼다 똥 된다

"엄마 지우개 어딨어?"


일등이의 목소리에 식탁에 있던 지우개를 떠올린다. 


"식탁 위에 있잖아"


분명히 내 목소리를 들었을 텐데 아이는 식탁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만 기웃거린다. 


"새 지우개 안 쓸 거야?"

얼마 전 일등이는 유치원에서 새 지우개 두 개를 선물 받았다. 유치원 선생님이 준 미션을 수행한 대가로 받은 상이었다. 가운데에 복숭아가 새겨진 반투명 지우개로 문구덕후인 나까지 홀릴 만큼 예뻤다. 이후 두어 달이 지났지만 지우개는 머리에 검은 자국 하나 없이 집으로 올 때 그대로를 유지하는 중이다. 


"아니 그거 말고..."

오늘도 일등이는 새 지우개 대신 헌 내 지우개를 쓸 요량이다. 왜 새 것은 안 쓰는지 물어보지만 쭈뼛쭈뼛할 뿐이다. 분명 새 지우개가 아까운 거다. 


아이의 모습에게서 묘한 공감이 든다. 

새 물건은 두 가지 마음을 가져다준다. 설렘과 망설임.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설렘으로 가득 차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을 쓰고 싶어서 안달나지만 

막상 쓰자고 하면 이내 헌것이 되고 만다며 아까운 생각이 슬그머니 차오른다. 


특히 지우개가 그렇다. 새하얀 지우개를 보면 당장이라도 쓰고 싶지만

새하얀 모습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 그대로 두고 오래된 지우개를 꺼내곤 했다.

그러다가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누렇게 변해버린 지우개를 보며 미련한 나를 탓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미련함을 닮지 않길 바라며 아들에게 한마디 건넨다. 

"그냥 써 아끼다 똥 된다"


내 말에 남편이 웃는다. 


그러자 갑자기 싱크대 안에 있는 도마 하나가 생각났다.

몇 해 전 시아버지께서 좋은 나무로 만들었다며 선물로 주신 나무도마였다. 

언뜻 봐도 나뭇결이 살아있고 단단한 게 

목재, 원목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도 훌륭했다.


다만 문제는 쓰는 이였다.

도마라는 게 음식과 관련되어 있다 보니 관리가 굉장히 중요한데

나무도마는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직사광선을 피해 말리고 통풍도 잘 시켜줘야 오래 쓸 수 있다.  


이 모든 게 살림 초보인 나에겐 굉장한 미션처럼 느껴졌다. 

내가 괜히 비싸고 훌륭한 나무를 망가뜨리는 건 아닐까?

윤기 나는 저 도마가 빛바랜 채 제 기능을 못하는 걸 내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차일피일 사용하는 걸 미루다 보니 어느새 몇 년이 흘러버렸다.


지우개와 도마를 보며 만약 저 물건 들으러 동화를 쓴다면 어떨까? 라며 스토리를 떠올려본다. 


평소 깔끔한 성격인 일등이 지우개(혹은 도마)는 울긋불긋 더럽고 찌그러진 모양의 다른 지우개를 보며 

자신은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단 생각을 해왔다.

하루에도 쉴 새 없이 불려 가며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친구들(혹은 도마)이 참으로 미련해 보였다. 자신을 아끼는 주인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매일매일 예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하루이틀 똑같은 삶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삶이 점차 쓸모없다고 여겨지기 시작하고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져만 갔다. 처음의 예쁜 모습도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다 또 다른 새 지우개(도마)가 들어오고 주인의 관심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끼자 

자신은 더 이상 어떤 의미도 없는 물건일 뿐이란 걸 알게 된다. 

지어진 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란 걸 깨달은 그때, 

주인의 손이 일등이 지우개(혹은 도마)에 닿고, 

일등이 지우개는 새로운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도마나 지우개 입장에서는 더러워지는 것보다 어떻게 해서든 한 번이라도 제 기능을 해보는 더 나은 선택은 아니었을까? 더럽히는 게 싫다고... 망가지는 게 싫다고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한 번이라도 몸을 던져보는 게 값진 삶은 아니었을까?


지우개와 도마에 내 삶을 빗대어 본다. 

'젊고 예쁜(젊어서 예쁘단 뜻이다)... 보이는 모습에 기대기보다 지어진 모습 그대로 쓰임 받는 게 행복한 삶이다.'라며 다시 한번 삶의 각오를 다져본다. 


그리고 일주일 후... 


여전히 지우개와 도마는 새것 그대로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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