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학생, 트레이너, 딸, 여자친구, 언니, 죽마고우. 나는 지금 다양항 모습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상대에 따라 나는 카멜레온처럼 내 색을 바꾼다. 그런 삶 속에서 나는 나를 잃는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헷갈린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거절을 어려워하던 나는 ‘YES’만을 외치다가 나 스스로를 무참히 갉아먹었다. 지금은 나의 소중한 몇몇의 사람들에게만 내 소중한 애정을 퍼부어 주려 노력한다. 그래도 여전히 ‘NO’는 어렵다.
이성과의 관계에서 ‘NO’를 말하는 것은 내게 더 어려웠다. 나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거의 모두 내가 원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길 원했다. 내가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고 말을 했음에도, 결국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야 말았고, 나는 불편한 마음에도 상대방이 나를 싫어할까 억지로 안겨있었다. 내가 거절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보일 표정이 두려웠다. 생긴 것과 다르게 비싸게 군다는 그 눈빛. 스킨십 전의 애정 어린 표정에서 굳은 표정으로의 변화. 그가 나를 원하지 않게 된다는 게 무서웠다. 나는 무한한 애정을 받고서야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억지로 괜찮은 척, 좋아하는 척을 해야 했던 나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싫어졌다. 어떻게든 나를 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럽고 피곤했다. 스스로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홀로 지내는 것이 더 편할 것만 같다.
일을 할 때에도 거절이 무척 어려웠다. 최근 퇴사를 하게 되었다. 작년 말 즈음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처음 들어갔을 때, 매니저님은 내가 해야 할 업무 외의 다양한 잡무를 요구했다. 프리랜서로 한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매주 회의를 빙자한 청소를 해야 했다. 또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한 채, 배너나 포스터를 걸고 수거했다. 영수증 리뷰, 블로그 글쓰기 등 퍼스널트레이닝 외 갖가지의 일을 했다. 또한 내가 더 이상 수업을 늘릴 수 없는 상황에도, 다른 사람의 수업을 줄여서라도 회원을 더 받으라고 강요받았다. 물론 회원을 받은 후 매출은 나의 인센티브가 되지 않았다. 그저 학교를 다니는 상황에서 일만 더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참아냈다. 하지만 당연한 건 없었다. 2월에는 수업을 하다가 울음을 삼켰다. 3월에는 창고에서 몰래 울다가 수업을 하러 갔다. 이 슬픔을 참지 못할 때쯤, 난 거절을 했다. “저 더 이상은 회원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한마디가 왜 힘들었을까. 나는 왜 나를 위해 “싫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할 수 없었을까. 나를 사랑한다면 꼭 해야만 했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미련한 나 때문에 내 마음이 또 다쳐버렸다. 이후에도 다양한 일이 있었지만 한 번의 거절 이후 그런 것쯤은 아주 사소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었다. 난 상사에게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이젠 두렵지 않으니까.
예민한 기질을 타고나서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삶이 쉽지는 않다. 거슬리고 싫은 게 많아도 내가 이야기를 하면 상대가 싫어할 테니, 그저 무던한 척 하하 웃으며 넘기길 여러 번이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거절할 상황이 생기면 연락을 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생활을 하며 내었던 그 한 번의 용기로 조금의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싫다고 해도, 상대에게는 내가 아쉬운 사람이면 내 거절을 받아들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