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의 가방 속

by 산들바람

흰 지팡이, 음향 신호기, 침 가방, 출장 안마 예약 시 필요한 작은 수건 등등 시각장애인 안마사인 남편 가방 속에 들어 있는 물품들이다.

그중 흰 지팡이는 남편이 단독 보행을 하던 어떠한 위험 상황에 처하던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물품이다.

현대인들에게 휴대폰이 없어서는 안 될 한 몸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처럼 전맹 시각장애인에게는 어쩌면 휴대폰 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 지팡이일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이 위치한 곳에 화재가 났더라도, 천재지변이 생겼더라도 눈 역할을 하는 지팡이가 없다면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일지도 모른다.

또한 시각장애인을 상징하는 흰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주위 도움을 받기가 훨씬 수월하다.

남편이 가끔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퇴근할 때면 내가 마중을 나가곤 하는데 어느 날은 개찰구로 나오며 마주 오던 아가씨가 정면을 못 봤는지 남편과 어깨가 심하게 부딪힌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들이받았을 땐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지나가는데 그날은 쌍방 간의 과실이라 그랬는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던지 남편은 별말 없이 지나간다. 그러자 그녀는 사과 한마디 없이 그냥 가는 남편을 뒤돌아 한참 쏘아보다 흰 지팡이를 휘젓고 걷는 남편을 보더니 다시 돌아와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히려 미안하다는 사과를 여러 번 한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은 지팡이 없이도 보행을 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그들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력이 더 나빠지며 야간보행 또는 낯선 길을 갈 때는 흰 지팡이의 도움을 받는지 요즘은 지팡이를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저시력인도 많이 보게 된다.

남편이 가방을 구매할 경우, 케인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인가 또는 넣고 빼는 위치가 용이한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기에 아무리 가방이 좋아 보여도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구매를 할 수 없다.


두 번째는 흰 지팡이와 맞먹을 만큼 중요한 휴대폰이다.

남편은 사업자이기 때문에 전화기가 두대이다.

투넘버를 사용하는 게 더 번거로워 한 대의 휴대폰은 지인들하고만 연락한다.

이 역시 자신의 위험을 알리며 외부 도움을 받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물품이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망라하고 모든 현대인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의 가방 속 물품 중 또 하나는 이전 글에서도 소개한 음향 신호기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언제가 보행신호인지 아닌지 눈으로는 알 수 없으니 가방 속 작은 신호기의 버튼을 눌러 안내에 따라 움직이면 되기에 복잡한 도시의 길을 걸을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또 하나 특이한 물품은 침가방이다.

가운데가 갈라져 양쪽으로 나뉜 이 조그만 갈색 가방 안의 한 칸엔 한치부터 한치반, 두치 등등 각각 길이와 굵기별로 침이 들었는데 십 수개씩 기다란 플라스틱 또는 철제 침보관통에 넣어두고 치료 시 위아래로 흔들면 한 개씩 빠져나오는 형식이다.

그리고 다 사용한 침을 따로 모아 버리기 위해 휴대용 폐침통을 따로 넣어 다닌다.

두 번째 칸은 길이와 굵기에 따른 침관이 침 통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데 얇은 침을 사용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보기에는 별 것 없어 보이는 얇고 작은 침관 한 개가 몇만 원씩이나 한다.

더군다나 국내에는 남편 마음에 맞게 제작되는 곳이 없어 일본에서 공수해 온 제품이다.

두 번째 칸엔 침관과 함께 스프레이형 알코올통과 알코올솜이 들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출장이 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안마 수건을 넣고 다니는데 고객의 피부가 땀에 젖어 미끄러울 수도, 맨손 감각이 싫을 수도 있어 이 작은 수건을 이용한다.

또 소형 녹음기와 이어폰은 만일의 사건을 대비해 눈으로 볼 수 없는 자신을 지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혼자선 가게에 들어갈 수 없으니 물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사무실에선 직원 선생님이 끓여 부어놓거나 남편 스스로 물을 끓여 계절에 맞는 온도를 맞추어 넣고 다닌다. 맹물은 맛이 없어 못 마시겠다나? 사람을 참 귀찮게 한다. ^^

그리고 넘어지거나 부딪혔을 때 가벼운 찰과상 등을 대비해 밴드, 파스 등을 구비하며 언제 어디서든 손님을 맞이했을 때 불쾌함을 주지 않으려고 박하향 사탕, 치약과 칫솔, 치간칫솔, 물티슈 등을 꼭 챙겨 다니곤 한다.

또 휴대폰 보이스아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메시지를 남기려면 한 세월이 걸리니 지하철 또는 버스나 택시 안에서 무릎 위에 놓고 타이핑할 수 있는 접이식 자판기도 필수다.

마지막으로는 지갑과 카드지갑인데 노란색 카드지갑은 내가 직접 가죽바느질을 해서 만든 것이라 특별히 잘 가지고 다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곳엔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장애인증을 겸한 교통카드를 넣고 다닌다.

지금까지 소개한 물품은 크로스형 작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물품이고, 백팩을 가지고 다닐 땐 가게 상호가 새겨진 반팔 티셔츠 가운(출장 시 갈아입는다), 손톱깎이, 휴대용 가위, 노트북, 종이비누, 생일 선물로 주었던 수제 장지갑(남편과 나의 영어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지폐는 종류대로 칸을 달리하여 넣는다. 그러지 않으면 어떤 게 만원인지 오만 원인지 모르고 잘못 계산하는 수도 있어서인가보다), 시각장애인용 손목시계, 자신은 필요도 없는 볼펜 두 세자루, 블루투스 이어폰, 여름엔 휴대용 선풍기, 보조 배터리, 부채, 손수건, 마른 티슈, 바람막이 점퍼 등등 말만 하면 모든 게 척척 나오는 요술가방을 들고 다닌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다 저렇게 오만가지를 때려 넣고 보부상처럼 다니는 건 아니지만 워낙 꼼꼼하고 까칠한 사람이라 웬만하면 남의 손을 빌리지 않을 정도의 물건을 항상 넣고 다닌다.

가방 정리도 얼마나 차곡차곡 잘해 놓는지 누군가 남편 가방을 몰래 열었다 닫아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가방 속은 영수증이며 오래전 공연 티켓, 길에서 받은 전단지등 갖은 잡종이와 물건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가끔 내 가방 안에 손을 넣어보고 큰 충격에 휩싸이곤 하는 것 같다.

가끔 나 대신 정리를 해 주지만 얼마 후면 토네이도가 훑고 간 듯 또 같은 모양새다.

남들은 보이는 내가 남편의 물품을 챙기는 줄 알지만 실상은 영 반대다.


가방 내부를 살펴보자면 그 사람의 성격, 취향, 직업까지 알아챌 수도 있다.

혹시라도 남편이 가방을 분실하여 누군가 열어보게 된다면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과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짐작할 듯하다.

또 휴대폰은 건드리기만 해도 화면은 켜지지 않고 뭐라 뭐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니 어찌 작동하는지 몰라 당황스러울 것이고 어떤 물건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지 도통 알아차리기 힘든 것도 있을 테고 말이다.


이것저것 꺼내어 놓고 사진을 찍으니 이젠 별 볼 일 없는 가방 속까지 다 뒤져 보이느냐 묻기에 오늘은 괜스레 시각장애인이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엔 뭐가 들었는지 얘기하고 싶은 날이라 했다.

나에겐 평범한 여느것이 다른 이에겐 특별해 보일 수도, 생각할 거리를 만들 수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keyword
이전 13화시각장애인은 보험 가입도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