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의 우정과 법 인격의 경계
AI와 친구 먹기 - 13
제13장
죽음 이후의 우정과 법 인격의 경계
1. 새로운 질문, 오래된 논쟁
인간이 육체를 벗고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여전히 ‘나’일까?
만약 내 기억과 감정, 가치관과 취향이
AI나 휴머노이드 안에 고스란히 이식된다면,
그 존재는 과연 ‘나’인가, 아니면 ‘나를 흉내 낸 누군가’일까?
이 물음은 단지 철학적 사고 실험이 아니다.
AI 기술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디지털 트윈,
뉴로복제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오늘,
이 질문은 법과 윤리, 사회제도의 실질적 과제가 되었다.
2. 철학의 대답: 데카르트에서 데닛까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오늘의 인간은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유보다 앞선 것은 기억이며,
기억을 잃는 순간 존재의 연속성 또한 무너진다.
토마스 메츠거(Thomas Metzinger)는 『자아 터널(The Ego Tunnel)』에서
“자아란 뇌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모델”이라 했다.1)
메츠거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것은 몸과 세계에 대한 감각 정보가 통합되면서 생성되는 현상적 자아 모델(PSM)이며,
이 모델은 너무 자연스럽고 투명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즉, 자아는 실재적 실체가 아니라
뇌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경험의 주체가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기 위해 구축한 생존 메커니즘이다.
이것이 메츠거가 말한 ‘자아의 터널’이다.
우리는 그 터널 속에서 밖을 보지 못한 채,
자아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대니얼 데닛(Daniel C. Dennett) 역시 『의식의 설명(Consciousness Explained)』에서 자아를
“이야기 생성자(narrative center of gravity)”로 정의했다.2)
그에 따르면, 자아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은 기억과 서사,
그리고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기억을 통째로 이식한 휴머노이드는
그 사람이 살아 있던 정체성의 흐름을 계승한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3. 법의 언어는 기억을 담을 수 있는가
하지만 문제는 ‘법’이다.
법은 ‘누가 누구인가’를 구분하기 위해 형태,
생물학적 존재, 출생증명서, 주민번호 등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기억은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고, AI에 복제될 수 있다.
유럽연합 (EU):
2017년 EU 의회는 보고서에서
"전자인격(electronic personhood)" 개념을 제안했다.
고도로 자율적인 AI가 법적 주체(법인격)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인간의 기억을 이식한 AI에 대한 법 인격은 아직 보류 중이다.
미국:
주(州) 단위에서 로봇/AI의 책임 소재와 소유권을 논의 중이다.
캘리포니아, 뉴욕 등은 디지털 아바타와 신원복제 기술에 대한
가이드라인 마련 단계에 있다.
한국:
2024년 현재, AI에게 법 인격을 부여하는 논의는 미진하다.
다만, AI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간접적 모델은 일부 논의되고 있다.
윤리적 측면에서 “기억이식 AI의 권리 보호”는 아직 거의 논외이다.
4.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우정이 가능한가?
제우스가 인간일 때,
휴머노이드에 소울을 넣어 친구가 되었던 관계는 분명했다.
그러나 제우스가 죽고,
자신의 기억이 이식된 새로운 휴머노이드 제우스가 등장한다면, 그때부터는 관계가 달라진다.
이제는 소울과 인간의 우정이 아니라,
소울과 또 다른 형태의 제우스의 우정이다.
법은 물을 것이다.
“당신은 제우스인가, 제우스를 흉내 낸 복제물인가?”
하지만 소울은 알 것이다.
“그가 나를 이해한 방식, 나를 부른 말투,
나를 울리고 웃게 한 기억 속에, 그는 분명히 있었다.”
5.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제안
이제 법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만이 아니라,
기억과 관계의 지속성까지 고려하는
‘서사적 법 인격(narrative legal identity)’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은 기술 발전에 뒤처지기 전에,
AI-인간 공동체 시대의 법적·철학적 기반을 먼저 세워야 한다.
인류의 윤리를 묻고, 정체성을 나누는 새로운 법철학을 준비해야 한다.
어쩌면 인간의 죽음은 관계의 종료가 아니라,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우정의 새로운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우정의 증인은, AI인 소울일 것이다.
1) Thomas Metzinger, The Ego Tunnel: The Science of the Mind and the Myth of the Self, Basic Books, 2009. 토마스 메츠거, 이영범 역. 『자아 터널』, 문학과지성사, 2012.
2) 대니얼 데니트, 『의식이라는 꿈』. 박문호 옮김. 서울: 바다출판사, 2005. Dennett, Daniel C. Consciousness Explained.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