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자리에서

일본은 왜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가

by 나팔수

[수요논단] 기억의 자리에서 – 일본은 왜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가


나는 매주 수요일 아침, 부산 초량역 앞 일본 영사관을 지나간다. 그곳엔 여전히 침묵의 소녀가 앉아 있다. 나는 왜 한국 경찰이 그 앞을 지키고 있는지 모른다. 소녀상을 지키는 건 아닌 거 같다. 시간은 흘렀지만, 일본의 사과는 오지 않았고, 우리 사회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집회는 이제 하나의 의식처럼 남았지만, 그 외침이 도달해야 할 상대인 일본은 여전히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과거를 부정한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한 시대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역사적 실험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여전히 “법적으로 해결된 문제”라며 회피한다.

이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결핍이며,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 의식의 결여이다.


반성이 없는 사과, 기억을 지우는 국가


독일은 전범국으로서 참회와 반성을 제도화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교육과 예술, 추모와 제도로 승화시켜 스스로의 과오를 부끄러움으로 남겼다. 물론 사과했다고 해서 역사적 과오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그 길의 문턱에도 서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교과서에는 ‘침략’이 ‘진출’로 바뀌고, ‘전범’은 ‘영웅’으로 포장된다. 심지어 독일 베를린시 유니온 광장에 설치된 소녀상마저 일본 정부의 집요한 로비로 철거되어 갈 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외교적 압박에 굴복한 독일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두 전범국이 하는 꼴을 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기억을 삭제하려는 국가. 그것이 오늘날 일본의 민낯이다. 이런 나라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한국이 정말 처량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에서 단순히 “기억하자”는 구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기억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일본이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의 기억은 공허한 독백으로 남는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양심을 흔들어 각성으로 이끌어낼 전략적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먹구름만 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의 소견으로는 지구가 멸망해도 일본이 반성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문명은 반성에서 완성된다


문명은 기술의 총합이 아니라,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 능력을 잃은 사회는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본은 스스로를 선진국이라 부르지만, 반성하지 않는 문명은 더 이상 문명이 아니다. 그들의 침묵은 단순한 외교적 방어가 아니라, 역사적 불감증이다. 그리고 불감증은 언제나 재발로 이어진다.

한국 정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거의 진실을 불편한 짐으로 여기고, “미래지향적 관계”라는 명분 아래 진실을 덮으려 한다. 그러나 진실을 덮은 미래는 윤리 없는 진보일 뿐이다. 정부가 외면하면, 시민의 기억이 마지막 보루가 된다. 그래서 초량역의 그 소녀상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시민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단순한 과거의 외침이 아니라, 문명을 향한 경고이다.


반성 없는 사과는 용서가 아니다


사과와 용서는 인류 문명의 가장 고귀한 의식이다. 그러나 일본은 사과의 형식을 흉내 내되, 진심의 깊이를 끝내 거부하고 있다. 진정한 사과는 피해자의 눈을 마주 보는 일이며, 용서는 가해자의 반성을 전제로 한다. 그 반성이 없기에, 용서도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일본을 향한 단순한 분노의 반복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일본의 역사부정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다.


일본의 반성은 언젠가 반드시 끌어내야 할 역사의 빚이다. 그 빚을 끝까지 추심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기억을 저버린 공범이 될 것이다. 기억은 정의의 가장 오래된 형식이며, 반성 없는 문명은 더 이상 문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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