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연구 3 - 일본

문명국의 가면을 쓴 책임 회피 국가

by 나팔수

국가연구 3 - 일본

문명국의 가면을 쓴 책임 회피 국가

― 근대를 가장 잘 흉내 냈으나, 끝내 책임을 배우지 못한 나라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국가의 외형을 완성한 나라다.

헌법을 만들었고, 의회를 세웠으며, 산업화에 성공했고, 제국을 건설했다.

패전 이후에는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고 선언했고, 오늘날에는 법치와 자유, 평화를 말하는 국가로 국제사회에 존재한다.


겉으로 보면 일본은 분명 ‘성공한 근대 국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는 완성된 근대라기보다 관리된 근대에 가까웠다.

일본은 근대를 받아들였지만, 근대가 요구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즉 권력에 대한 책임과 윤리적 자기 성찰까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글은 일본이 무엇을 했는지를 나열하려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이 무엇을 끝내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왜 지금까지도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반복시키는지를 독자가 따라올 수 있도록 하나씩 설명하려는 국가 연구이다.


1. 메이지 유신 ― 시민 없는 근대의 출발


메이지 유신은 흔히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찬양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시민 혁명이 아니었다.

유럽의 근대는 왕권을 해체하고 권력의 정당성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이었다.

반면 일본에서 권력은 이동하지 않았다.

천황은 그대로 남았고, 지배층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권력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구조를 유지했다.


헌법과 의회는 만들어졌지만, 시민이 국가를 통제한다는 개념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일본의 근대는 시민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국가를 강하게 만들고 동원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이 출발점의 차이는 이후 일본이 권력에 책임을 묻지 않는 국가로 굳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2. 제국 일본 ― 질서의 언어로 수행된 폭력


일본 제국의 폭력은 충동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법과 행정, 조직을 통해 체계적으로 설계된 폭력이었다.


조선 병합은 총칼 이전에 조약과 행정 문서로 시작되었고, 식민 지배는 경찰·교육·언어 정책을 통해 일상 속으로 침투했다. 강제동원은 전쟁 말기의 예외적 조치가 아니라, 제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적 정책이었다.


‘위안부’ 제도 역시 일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군이 직접 개입한 조직적 성폭력 시스템이었다. 피해는 개인에게 집중되었지만, 책임은 구조 속에 흩어졌다.


일본의 폭력은 야만의 폭발이 아니라

문명을 동원해 수행된 폭력이었다.

그래서 더욱 위험했고,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


3. 패전과 전범 재판 ― 처벌은 있었으나, 책임은 없었다


패전 이후 일본은 전범 재판을 겪었다.

겉으로 보면 일본은 과거를 청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재판은 책임의 완성이 아니라 책임의 분산으로 작동했다. 개인은 처벌되었지만, 전쟁을 가능하게 한 국가 구조는 해체되지 않았다.


정치 관료, 군 엘리트, 재벌은 전후 일본 사회의 핵심으로 그대로 복귀했다.

일본은 “전범은 처벌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무엇을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일본은 패배했지만, 패배를 깊이 사유하지는 않았다.


4. 천황 책임 ― 비워진 정점, 지속된 면책


메이지 헌법 체제에서 천황은 상징이 아니었다. 천황은 통치의 근원이었고,

군대는 ‘천황의 군대’였으며, 전쟁은 천황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그럼에도 패전 이후 천황은 단 한 번도 책임의 주체로 법정에 서지 않았다.

‘상징 천황’으로의 전환은 책임의 재정립이 아니라 책임의 증발이었다.

이로써 일본 사회에는 국가의 정점이 비어 있는 구조가 남았다. 책임은 아래로 흘러 흩어졌고, 권력의 핵심은 침묵 속에서 보호되었다.


5. 전범기업 ― 처벌되지 않은 경제, 계속된 이익


전쟁은 일본 기업에게 예외적인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과 결합한

가장 안정적인 성장 경로였다.

강제동원은 국가와 기업이 공모한 시스템이었고, 전쟁은 기업 확장의 촉매였다.ㅈ패전 이후 이 기업들은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전후 고도성장의 주역이 되었다.


전쟁으로 이익을 본 구조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사회에

국가를 위해 봉사한 자본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위험한 신호를 남겼다.


6. 기억의 정치 ― 피해는 말하고, 가해는 흐린다


일본의 전후 기억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선택되고 관리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반복해서 기억되지만, 조선과 중국에서 벌어진 학살과 약탈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다.

일본은 자신을 가해국이 아니라

‘전쟁의 피해자’로 재구성해 왔다.

이 기억의 선택은 우연이 아니다.

책임을 피하기 위한 국가적 기억 전략이다.


7. 교과서 왜곡 ― 미래를 훼손하는 가장 위험한 선택


교과서는 단순한 교육 자료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승인한 기억의 설계도다.

침략은 ‘진출’로 바뀌고, 강제는 ‘동원’으로 완화되며, 가해의 주어는 점점 사라진다.


이 왜곡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는 책임을 배우지 못하고,

그다음 세대는 잘못이 있었는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교과서 왜곡은

사과 거부보다 더 심각하다. 사과는 현재의 문제지만, 교과서는 미래의 윤리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기억 정치의 상징적 공간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다. 이곳은 단순한 추모지가 아니라, 왜곡된 기억이 집약된 국가적 장치다.


8. 한국과 일본 ― 왜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가


한일 관계가 갈등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언제까지 과거 이야기만 할 것인가”,

“이제는 미래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겉으로 보면 이 말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국가 간 외교는 미래를 향해야 하고,

과거에 머무르는 것은 비생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일 갈등은 과거에 집착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 반복해서 돌아오는 문제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갈등은 영원히 이해되지 않는다. 조약은 끝났지만, 책임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반복해서 말해왔다. 조약으로 문제가 해결되었고, 법적으로는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조약이 정리하는 것은 국가 간의 법적 관계이지, 역사가 남긴 폭력의 책임과 윤리적 의무까지는 아니다. 법은 문서로 끝날 수 있지만, 폭력의 기억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이 문제는 피해가 추상적인 숫자나 통계로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피해자는 실존하는 개인이었고, 그 증언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그 고통은 가족과 사회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쉽게 ‘과거’가 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다. 반면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는 점점 “이미 끝난 외교 문제”로 취급되어 왔다.

한국은 기억 속에서 현재를 살고 있고,

일본은 종결 선언 속에서 현재를 관리하고 있다. 이 시간의 어긋남이 갈등의 핵심이다.


사과가 반복되어도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

일본은 여러 차례 사과의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 사과는 조건부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으며, 법적 책임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사과는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외교적 관리로 인식된다.


기억을 관리하려는 국가, 기억을 증언하는 사회

이 갈등은 기억을 관리하려는 국가와

기억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사이의 충돌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문이 새로 쓰여도, 다시 반복된다.


9. 근대를 배웠으나 책임을 배우지 못한 국가


일본은 근대를 가장 잘 배운 나라였다.

그러나 근대가 요구하는 책임의 윤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과는 반복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고, 기억은 관리되지만 책임은 남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은 여전히 과거에 붙잡혀 있으며,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도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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