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9편 외전(연재)

우리는 가족으로 시작해 외로움으로 나아가는가 - 루소: 요 17:21.

by Leo Song

삶의 지혜 9편 외전



우리는 가족으로 시작해 외로움으로 나아가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우리는 “우리”로 시작했다.

가족, 학교, 사회, 공동체 속에서 ‘나’는 언제나 ‘우리의 일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사람은 가족 속에서도 외롭고, 공동체 안에서도 고립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우리’로 시작하게 하면서, ‘나의 외로움’으로 끝나게 하는 걸까?



루소 ―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루소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정의했다.
- 그런데 정말 그런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고?
아니,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수많은 쇠사슬

- 언어, 문화, 욕망, 관계, 유전, 체제—에 묶여 있다.


루소는 그 쇠사슬의 존재 자체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자유”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었다.

그의 일반의지—모든 사람의 이익을 아우르는 공동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이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선하지 않다.

그는 사랑을 배워야 하고,

정의를 훈련받아야 하며,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자신의 자녀를 고아원에 버린 루소가 공동선을 말한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실천된 적 없는 공허한 허상임을 증명한다.


그의 계약은 이미 파산된 약속이었다.



예슈아 ―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1)


예슈아의 말씀은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정반대에 서 있다.

루소는 제도와 합의로 ‘우리’를 만들려 했지만,
예슈아는 관계와 사랑으로 ‘하나’를 세우신다.


루소의 계약은 조건적이고 파기될 수 있지만,
예슈아의 기도는 언약이고 영원한 관계다.

그분이 말한 하나 됨은 제도의 통합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신 사이에 깨어진 관계를

사랑으로 다시 연결하는 것.

그것이 요 17:21의 깊은 뜻이다.



“가족으로 시작해 외로움으로 나아가는가?”


루소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계약은 언제든 파기되고, 공동체는 언제든 해체된다.
결국 인간은 혼자 남는다.
그러나 예슈아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그분의 관계 안에서는, 외로움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외로움은 하나 됨을 향한 목마름,
사랑을 향한 본향의 기억이다.


우리는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이지만,
예슈아 안에서 관계를 회복할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되찾는다.

루소의 자유는 인간이 만든 계약에서 나오지만,
예슈아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서 온다.



세 줄의 지혜


루소의 자유는 혼자의 외로움을 낳고,
예슈아의 사랑은 함께의 존재를 세운다.


가족은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는 자리다.



- 편집자 주 –


루소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를 말하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관계의 단절 위에서만 가능했다.


예슈아의 기도는 그 반대다.
그분은 자유를 잃더라도 사랑을 지키는 존재의 길을 보여주셨다.


“가족으로 시작해 외로움으로 나아가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로 시작해 하나 됨으로 완성되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글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넘어,
- 관계의 단절을 틱쿤으로 바꾸는 ‘언약의 사유’-를 묻는다.


우리는 이제 계약의 언어가 아니라,
언약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본문 해석과 묵상은 저자(레오 송)의 창작물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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