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은 백지수표가 아니다

by 기분울쩍

선거는 경제, 안보, 복지 등 다차원적 이슈를 단 한 번의 투표로 결정하는 완전하지 않은 게임이다. 유권자는 후보자의 경제공약에는 지지하지만 외교공약에는 지지하지 않더라고 후보자에게 1/2표만 투표할 순 없다. 어쩔 수 없게 찬성/반대 1표씩만 행사가 가능하다.


이런 선거의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또는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치인들은 일단 당선이 되면 자신이 하는, 자신의 정당이 하는 모든 일에 백지수표를 받은 것처럼 행동한다. 비판에 대해서는 국민의 뜻이다, 공약을 걸고 당선됐다, 심지어는 선거불복이다까지 언급하며 가뿐히 무시한다.


베르나르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현대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나보다 나은 사람을 뽑는 행위로 본질적으로 귀족적이며 일단 뽑힌 이후에는 유권자에게 얽매이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약은 유권자가 나를 선택한 이유라 하며 추진하는 반면, 하기 싫은 공약은 무시해도 유권자는 이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선거의 본질적 모순이다.


대의민주주의의 모순을 갈파한 루소는 ‘유권자는 선거날만 주인이고 그다음 날부터 노예가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매일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약이 실행되기까지 우리의 선호가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공약이니까 무조건 한다’식의 최근의 여당과 정부의 행보는 국민의 참여를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현 정부의 취지와 맞지 않다.


이제 업무보고가 끝나면 공약이 현 정부의 국정과제로 채택되고 정책으로 추친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의 선호나 선거의 유불리에 따라 공약이 체리피킹되어 추진되고 그 과정에서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반대하더라도 유권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반대편에게서 ‘니들이 뽑았으니 감내하라’라는 조롱만 들을 뿐이다.


마넹은 대의제에 대해 인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제도가 아니라, 인민이 통치자를 선택하고 그들을 비판할 권리만을 가진 제도라는 씁쓸한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계엄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새장을 연 우리 국민은 여당과 정부에 무조건적 백지수표를 주지 않았다.


업무보고를 생중계한 것처럼 중요공약에 대해서는 국민토론을 거치고 최종결정과정을 공개하는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만으로도 선거과정에서 검증되지 못한 공약들에 대한 국민의 선호가 재파악되고 추진과정에서 불필요한 국론분열을 상당 부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거는 지지자들의 투표로만 당선이 되지만 공약이 정책으로 추진되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공약별로 후보자별로 소수점 단위로 투표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내란극복 급한 거 알지만 심호흡 한번 하고 사회적 숙의 과정을 거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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