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6월, 이탈리아의 한 사교계 인사는 이혼의 상처에 괴로워하던 서른아홉 나이 오랜 친구인 한 여인을 위로하고자 자신의 요트에 초청하여 그리스 옛 유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을 마련한다. 그는 여인뿐 아니라 몇몇 지인들도 초청하여 그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여인은 요트 파티에서 자기보다 열 살이나 어린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자기가 15년 전 영화 <로마의 휴일>을 촬영하던 곳에서, “이다음에 내가 어른이 되면 당신과 결혼하겠어요!”하고 사랑을 고백하였던 사내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운명 같은 만남에 둘은 사랑에 빠진다. 여인의 이름은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었고 젊은 남자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였다. 둘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으나 안드레아는 늙어가는 오드리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끝내 외도를 일삼는다. 두 번째 결혼까지 망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내내 어린 남편을 옹호하였던 오드리는 괴롭게만 이어지던 파경 생활에 지쳐 마침내 쉰세 살 중년의 나이로 이혼하고 만다. 이후 오드리는 유니세프 대사로 기아 아동 구호 사업에 전념한다.
오드리 헵번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로마의 휴일(남자 주인공은 그레고리 펙). 사진 영화 스틸 컷
오드리는 영국 은행가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남작 집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1929년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와 살지만, 아버지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파시즘 추종자로 히틀러를 맹렬히 지지하였고 이것은 훗날 오드리에게 평생의 짐이 되었다. 오드리는 유니세프 대사로 가난한 나라의 기아 아동 구호 활동에 전념한 것은 아버지가 저지른 빚을 조금이나마 씻어보려고 했다고 훗날 고백하기도 하였다. 오드리가 1940년 어머니를 따라 외할아버지 아르나우트 판헤임스트라 남작의 집으로 들어갔을 즈음 독일군이 중립국 네덜란드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로로 삼자 외할아버지는 독일에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독일군은 남작 집안의 자산과 영지를 몰수하는 등 갖은 수난을 안겼다. 이후 연합군의 마켓 작전으로 인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독일군은 민간인을 위한 식량 공급을 차단하였고, 그 때문에 오드리를 포함한 외가 사람들은 참혹할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땅을 파서 튤립 뿌리를 뽑아 먹었고,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목숨을 부지하였다. 어렸을 적에 겪은 이러한 끔찍한 경험 역시 그녀가 기아 아동 구호 사업에 눈을 뜬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원래 발레를 배웠으나 170cm라는 큰 키로 인하여 발레리나로서의 꿈을 접은 오드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어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일약 신데렐라가 되었다. 이후 <사브리나>, <파계>, <퍼니 페이스>,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어두워질 때까지>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19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소말리아 기근 아동 구호 활동 장면. 사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그런 그녀는 1970년대 들어서면서 자선사업 활동에 눈을 떴고 마침내 유니세프 대사가 되어 전 세계 오지 마을의 기아 아동을 구호하는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 전쟁 중 겪은 혹독한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에 걸리는 등 원래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녀는 대장암에 걸려 암 투병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소말리아 봉사활동을 해내는 등 자기가 선택한 길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 노구의 오드리가 영양실조에 걸려 보이는 어린 소녀를 업고 환하게 웃는 표정의 사진 한 장이 찍히면서 천사와 같은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많은 나라들로부터 기아 아동 구호 사업에 관한 큰 호응을 끌어내기까지 하였다. 이때 오드리가 사진 찍기에만 만족하였다면 그녀의 봉사활동에는 진정성이 없었을 것이다. 오드리는 오지를 찾아가는 봉사활동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돌아와서는 자기의 지명도를 최대한 살려 구호 활동의 저변을 끊임없이 넓혔다. 구호 활동이라는 것은 한때 잠깐 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런 오드리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전 세계 사람들은 최대의 찬사를 보내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반대하고 제주도에 정착한 김만희의 먼 후손 김만덕은 열두 살 나이에 조실부모한 후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잠시 기녀가 되었으나 제주 목사에 의하여 양인이 되어 객주 상인의 길로 들어선다. 상인으로서의 재간이 출중하였던 김만덕은 육지 물품과 맞교환하는 방식의 장사로 큰돈을 벌었으나 평소에는 검약하게 살면서 인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곤 하였다. 1793년 제주 땅에 대기근이 들어 6백 명이나 아사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정부가 쌀 2만 섬을 실은 구휼선을 제주에 보냈으나 다섯 척의 배가 침몰하는 등 낭패를 보게 되자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육지로부터 쌀 5백 석을 사서 급히 아사 직전의 제주민에게 풀었다. 그로써 제주민에게 떨어질 뻔한 큰 재앙을 막은 것이다. 평소에도 선행을 베풀며 살던 의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김만덕에게 정조 임금이 소원을 묻자 그저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을 뿐이었다. 관의 허락이 없으면 제주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으나 정조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김만덕에게는 따로 차비대령행수라는 내의원직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근 삼백 년 동안 경주에서 부자로 명성을 날린 경주 부자 최씨 집안의 12대를 이은 구휼 정신은 이렇게 펼쳐졌다. 중간에 소작료를 착취하는 마름을 없애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는 소작땅을 내주었고, 보릿고개 시기가 되면 쌀을 풀어 인근 백 리 이내 사람들을 굶주리지 않게 관리하였다. 어쩌다 굶주린 유랑자들이 나타나면 그 또한 아낌없는 적선을 하였다.
충남 논산의 명재 고택. 한국전쟁 때 한국 공군이 미군 공군과 함께 북한군을 폭격할 때 논산 출신의 한국 공군 비행사가 고도의 폭격술로 고택을 보존하였다. 사진 위키백과
조선 중기 이후의 학자로 경주 최씨 집안 못지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충남 논산 사람 명재 윤증이다. 명재는 평소 인근 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그 후손들 역시 윤증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백 년 동안 선행을 이었다. 명재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논산 윤씨 집안 사람들은 마을 잔치를 열지 않고 오히려 수십억 원에 달하는 넓은 땅을 사회에 기부하였다. 명재의 정신이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소말리아 기근 아동 구호 활동 모습의 오드리 헵번(우측)과 비교되는 사진으로 한바탕 논란이 일어났다. 사진 YTN News 화면 갈무리
그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 참석차 동남아시아 순방 길에 올랐을 때 프놈펜에서 말 많은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부인이 심장병 앓는 어린이들을 찾은 것인데 그때 찍어 배포한 사진이 영락없는 오드리 헵번 흉내 사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조명기구까지 세팅한 연출 촬영이라는 분석까지 나와 사람들의 쓴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반짝 쇼가 아니다. 지속성이 있어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영부인이 한국에 돌아와 기아 구호 활동에 계속 열의를 보인다면 그것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발현일 것이다. 기다려보면 진정성이 있는지 아니면 이미지 개선을 위한 가소로운 홍보 행각이었는지 알 것이다. 명재 후손 집안사람임을 잊지 않는다면 조상의 위대한 선행 정신에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한국 연예인의 해외 기아 구호 봉사활동의 선구자인 국민배우로 제1회 아름다운 예술인상을 수상한 김혜자. 사진 월드비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거창한 것이 아닌 누구든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은 오드리 헵번이 아들들에게 남긴 유언 중의 이 말로 알 수 있다. “재산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회복하여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누구도 내버리지 말거라.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너희는 그 도움을 너희 손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 너희는 손이 두 개인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하나는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