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든 햇살 Aug 25. 2023

깜빡 속아서


    오래 기다리던 삼월이었다. 창밖으로 말갛게 쏟아지는 햇살이 반가웠다. 비에 지쳐있던 축축한 몸에서 콧노래가 나왔다. 장 보러 가자는 말에 신이 났다. 이런 날은 햇볕을 받아줘야지. 날이 좋으니 우중충한 겨울옷엔 손이 가지 않았다. 지난주에 충동구매 했던 얇은 분홍색 윗옷이 눈웃음을 쳤다. 그 옷을 입고 쏘다니면 혹시라도 봄이 성큼 다가와 줄까? 얼른 옷을 입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로서리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알았다. 깜찍한 햇살이 나를 속였다는 걸. 찬바람이 옷 속으로 솔솔 스며들어 몸이 점점 오그라들었다. 옷깃을 여미며 괜히 기분 냈다고 후회했다. 몇 군데 돌며 장을 보는데 빨리 집에 가자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제야 아침 일찍 마당에 내린 서리를 기억해냈다. 햇살에 넋을 잃어 두어 시간 전의 기억마저 까맣게 잊은 것이다. 간절히 바라던 것을 마침내 대면하면 이렇게 넋이 나가는 걸까?  

    어떻게 사기를 당하게 되었을까? 명석한 지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도 나처럼 따뜻한 이중창의 안쪽에서 반짝이며 미혹하는 빛의 손짓을 본 것은 아닐까. 그가 내디딘 걸음도 길고 긴 기다림 뒤였을까. 이윤이 이례적으로 높다는 말, 아무에게나 줄 수 없는 기회라는 말로, 적들은 슬며시 그의 마음에 발을 들여놓았다. 

    뉴스에서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본다. 어떤 사람은 가족을 등지고, 어떤 사람은 재산을 모두 바치기도 했을 것이다. 속는다는 것은 봄 햇살의 최면 속으로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나서는 것이다. 바람의 채찍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다. 속이려는 자가 달콤한 몇 마디 말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올 만큼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 사람만의 갈급과 연약함이 있다. 

    우상의 본질은 무얼까? 그것은 자기 숭배가 아닐까. 자신이 갖지 못한 외모나 재능을 소유한 누군가를 만날 때 마음의 중심에 우상으로 들여놓는다. 그에게 자신을 투영해 그의 기쁨에 함께 기뻐한다. 더 나아가 풍요와 건강과 명성을 얻기 위해 어떤 형상을 세운다. 그 형상은 꼭 특정한 무엇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원하는 것,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는 섬김이란 어쩌면 자기를 속이는 모노드라마일 지도 모른다.  

    얼마 전 단체 카톡방에 가짜 뉴스를 전달하는 실수를 했다. 믿을만한 분이 보낸 소식이기에 의심치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뉴스는 몇 년 전에도 인터넷상에서 떠돌았다고 했다. 소식을 전해준 분도 깜빡 속은 것이다. 출처를 확인하자니 무례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전달한 것이 문제였다. 바로잡는 사과의 글을 올리며 낯이 뜨거웠다. 거짓이 소리 없이 밀려와 어느 틈에 발치에 와있다. ‘차가 막혀서’라는 말보다, ‘깜빡 속아서’가 더 흔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 위대한 제국들이 망할 때 도덕적 타락이 동반되었다는데, 거짓의 범람 속에 진위파악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이성이 두렵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며 절대적 가치를 거부 한다. 그래서 일까, 진위파악 보다 무슨 정보든 내게 유리한 쪽을 자의로 선택하여 사실로 믿어버리는 쉬운 길을 택한다. 언젠가 거짓을 지지한 대가를 치르게 되면, 그저 ‘깜빡 속아서’라는 허접한 변명으로 잠시 낯을 가리면 될 테니.

    내 방엔 전신 거울이 있다. 그 거울에 몸을 비추면 사실보다 더 날씬하게 보인다.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거울의 속임수에 흐뭇하게 속아 넘어간다. 거짓에 고의로 속아 넘어가는 무섭도록 편리한 이기의 시대다. 





작가의 이전글 온돌과 호두알 같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