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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5. 2023

불놀이야

   산책을 나섰다. 답답했던 한 낮의 더위를 식히려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등학교 근처 언덕에 오르니 서쪽 하늘에 널따랗게 펼쳐진 붉은 노을이 맞는다. 지붕 위에 올라가 셔터를 눌러대던 이웃이 내게 손을 흔들어 준다. 노을빛은 집과 나무들을, 사람들의 얼굴을 신비한 빛으로 뒤덮는다. 마을은 온통 불놀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이었다. 동아리에서 새내기 환영식 겸 봄맞이 MT를 떠났다. 촌티가 묻어나는 신입생들이 나름대로 한껏 멋을 내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선배들을 따라 나섰다. 잔잔한 자갈이 가득한 봄이 오는 강가였다. 연두와 분홍으로 옷 입은 가까운 산언덕은 아른아른 고왔다. 게임과 장기자랑이 끝나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김밥을 나누어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쓰레기들을 모아서 자갈밭 위에다 작은 불을 피웠다. 햇살이 유난히 따갑던 봄날 오후, 불어오는 바람에 작은 불꽃이 산언덕 쪽으로 한들거렸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어느 한 순간, 불꽃은 가까이에 있던 나지막한 수풀로 넓이 뛰기를 했다.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질러댔고 불길은 달리듯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모두는 이리 저리 뛰며 물을 나를 수 있는 그릇이 될 만한 것을 찾았다. 한 남학생이 겉옷을 벗더니 강물에 던져 넣어 젖은 옷으로 불을 끄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너도나도 따라 움직였다. 번져가는 불길을 겨우 잠재웠을 때, 이미 산등성이의 널찍한 한편이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곧이어 멀리 보이는 시골길에 구름 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 한 대가 달려왔다. 어르신 한 분이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쪽으로 부지런히 걸어오셨다. 군청에서 나왔다고 하시며 회장을 찾았다. 진땀을 빼며 어르신의 질문에 머리를 조아린 선배가 불쌍했다. 봄 소풍 나왔다가 구치소로 가게 될 판국이었다. 다음 날 군청에 출두해서 보고서를 내라는 엄명을 받았다. 

  봄이 사뿐히 오는 강가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 산등성이. 게다가 메케한 탄 냄새라니. 우리는 모두 넋이 나가서 다시 모여 앉았다. 집에 가기엔 너무 이르고 참담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꾸어 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회장이 앞에 나서더니 우리 노래할까요? 했다.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 박수칠 기분이 아니었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요?  아무도 말을 않는다. 갑자기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놀이야’ 합시다! 푸하하! 웃음이 터져 나오고 철없는 젊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깔깔대기 시작했다.

   모의고사와 야간 자율학습을 겨우 벗어나 그토록 마음 설레며 기다렸던 대학에서의 첫 MT였다. 그리고 다시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였건만, 예측불허의 일로 정신이 혼미했다. 그날의 불은 젊음의 방종에 대한 경고였을까?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모두 불의 위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불이되어 활활 타고 싶은 무모한 젊음이었다.

  즐기는 것을 배우지 못한 우리는 노는 것 마저 사생결단의 자세로 임했다. 연극에 빠진 친구는 외계인이나 된 듯 괴상한 복장을 하고 줄담배를 피워댔고, 술독에 빠져 살던 친구, 수업시간도 잊고 당구장에서 살던 친구도 있었다. 영어에 미친 친구는 생각도 영어로 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 분노한 젊음은 화염병을 던지며 정권이 바뀌는 새날을 꿈꾸었다. 철학에 빠져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친구는 땅만 보고 다녔다. 

  사랑도 하얗게 불태웠다. 친구와 함께 일일찻집에 갔던 날, 친구를 짝사랑했던 경영학과 순둥이가 커피 주문을 받으러 우리 테이블로 왔다. 도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설탕 네 스푼이요!’ 그의 떨리는 손이 천천히 친구의 커피 잔으로 설탕을 네 번 옮기는 동안 테이블은 온통 설탕 천지가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긴 머리의 여자 로커가 시원한 음성으로 ‘불놀이야’를 열창한다. 오래전 내 또래의 오빠부대들을 열광시켰던 그 노래를 다른 형태로 듣는다. 방청객들은 박수를 치며 흥겹다. 그들도 각자의 젊음을 떠올리고 있겠지. 허리를 묶는 줄도 없이 까마득한 강 아래로 새처럼 날던 아득한 그 젊은 날.


    저 들판 사이로, 내 마음의 창을 열고, 두 팔을 벌려서 돌면

    야! 불이 춤춘다. 불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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