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 정치 시대의 세 여인

by 이영호

평소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제3에서 제5공화국 시절 대한민국 밀실정치의 대명사인 서울 장안의 3대 요정 (대원각, 삼청각, 청운각) 중 현존하는 삼청각이다. 만나면 반갑고 즐거운 서 원장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니. 아침에 전화가 왔다. 같이 가자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옛 청와대 뒤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을 둘러 서울 시내를 관망하고, 다음 길상사에 들러 경내를 둘러본 후 삼청각에 들리는 코스라고 말했더니, 좋아하며 오후 2시에 만나자는 것이다. 서원장 승용차로 가기로 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서 만나 출발했다. 모두 4명이다.

북악 팔각정에서 북한산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며 차 한잔하고 잠시 쉬었다가 4시경에 길상사에 들렸다. 한 분은 10년 전에 두 분은 처음이다.

지난번에 문학기행 차 다녀간 곳이니, 내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다른 방문객들도 경내를 조용조용히 걸으면서 감상한다. 극락전 마당에는 부처님오신날 지난 지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연등이 빼곡히 하늘을 가린다.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있는 김영한 사당을 거쳐, 법정 스님의 진영과 유품, 유골이 모셔진 진영각에 들리니, 마침 해설사가 길상사에 대해 해설해주어서 더욱 좋았다.

경내 뜰에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 소리와 수련과 이름 모를 꽃들이 우리들을 반긴다. 서원장은 꽃에 관심이 많아 연신 사진을 찍고, 황 총무는 불심이 깊어 극락전에 들러 참배하고 나온다. 5시 반경에 삼청각으로 이동했다.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자동차로 일화정으로 가는 경로, 또 하나는 걸어서 솟을대문을 거쳐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대단히 화려하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런지 안내원이 차량통제를 하고, 올라가는 길옆에 많은 차가 정차되어있다. 안내해 주는 대로 건물 입구까지 들어가서 주차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니 오늘 결혼식이 있는지 많은 사람이 보인다. 예약해둔 한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평일보다는 저녁 식사비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오늘은 내가 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막걸리도 한잔하면서 옛 요정 삼청각에 귀한 손님이 되어 온 것 같은 기분을 상상하면서 맛있게 식사하고 난 후, 삼청각을 뒤로하고 휘황찬란한 서울의 밤거리를 누비며 귀가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 당시 서울의 3대 요정의 안주인이 어떤 분이었는가를 소문과 자료를 통해 살펴본다.

삼청각의 이정자는 일제 강점기부터 자리 잡은 서울 장안의 일류 요정인 옥류정의 둘째 딸이었다. 예쁘장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자리한 삼청각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대표하는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다.

여야 고위 정치인의 회동과 1960년대 한일회담의 막후협상,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 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 시절 요정 정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1980년대부터 등장한 룸살롱의 기세에 눌려 고급 요정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운영하던 이정자 역시 경영난으로 건설회사에 넘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만 남아있다.

2001년 서울시에서 인수, 복합 문화공간으로 운영, 새롭게 단장한 삼청각은 공연장, 한식당, 찻집, 객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월요일을 제외하고 연중 전통 공연, 결혼식을 하고 있다. 지금은 새로운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맡고 있다.


청운각의 조차임은 1905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30대에 젊은 나이에 홀로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서울로 상경, 식모살이하며 어렵게 생활하다가 청계천 변에서 국밥집도 하며 6.25 전쟁의 시련을 겪어가면서 종로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모은 돈으로, 1956년 저택을 매입, 고급 요릿집 청운각을 차렸다. 당시 정부 고위 관리와 공기업, 언론기관 및 대기업 임원들이 찾는 모임 장소가 되었고, 청운각의 전성기에는 다른 요 정보다 더 유명하였다고 한다.

청운각이 유명세를 치른 계기가 바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이 뛰어난 미모와 영어 실력도 갖추어 이 요정의 얼굴마담으로 있었고, 한때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도 사용되었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으로 정계의 이후락, 정일권이 아지트이기도 했다고 한다.

조차임은 돈을 많이 벌게 되자,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이 힘든 고학생들을 도왔으며, 건강 악화로 63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 장학사업과 학술사업을 펼쳐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전 재산을 털어 유언에 따라 ‘우산 육영회’ 장학재단을 설립하면서 청운각은 사라졌다.

피땀으로 번 돈을 정승처럼 쓰고 간 여걸이라 하겠다.

대원각의 김영한은 191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몰락과 결혼의 실패로 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진향(眞香)이라는 기생이 되었다.

길상사는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이 있다. 당대 꽃미남이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 천재 백석 시인과 기생 진향의 사랑 이야기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 회식 자리에서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첫눈에 반해 자야(子夜)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유명한 시 한 편을 남겼는데, 그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3년 동안 동거하고 사랑을 나누다가 남북이 분단되면서 백석은 북한에 김영한은 남한에서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그 후 서울로 내려온 김영한은 1955년 성북동 배밭골 일대의 땅을 사들여 청임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자, 요정인 대원각으로 키웠다.

30여 년 요정 집을 운영, 당시 시가로 천억이 넘는 재산을 모았다. 부를 얻었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평생 일군 전 재산 대원각을 시주하여 절로 만들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의 철학인 법정 스님의 거절로 10년 가까이 권유와 거절로 이어오다가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여 1997년 창건되어 길상사가 태어났다.

요정 대원각이 아름다운 변신을 한 것이다. 시주한 김영한은 법정 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을 받았다.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천억 원이 그 사람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고 하였다고 했다.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행복한 삶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김영한은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눈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뿌려주세요’ 하고 1999년 11월14일 108 염주를 목에 건채 83세 나이로 운명한다. 한 달 후 12월14일 길상사에 눈이 내리자 스님들은 그녀의 재를 길상사 앞마당에 뿌렸다.

장안의 영웅호걸들이 내로라하면서 들락거리던 고급 요정 집은 시대의 변화와 세월 속에 뒤안길로 이제 사라졌다.

밖에는 7월 장마철을 예고하듯 소낙비가 유리 창문을 두드린다.

오늘따라 그 옛날 젊은 시절, 방석집 아가씨들이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시며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노래하며 가슴속 슬픔을 달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파란만장했던 세월 속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의로운 삶을 살다 간 세 여인을 흠모하며,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데없고.

2023.7.12. (강서문학 제35호)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