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연꽃 당신
본격 남편 관찰 일지_너는 나에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 냐?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온다.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왔다, 그것도 금요일 밤에 청소하다가.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만 치울 요량이었다. 눈에 밟히는 것은 왜 그리 많은 건지. 결국 일이 커지고야 말았다. 나는 집안 전체를 건드리고야 말았다. 대청소가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나는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청소의 끝이 보일 때쯤, 바닥을 열심히 닦다가 나는 눈앞에 있는 남편을 보면서 남편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무슨 연유에선지 퍼뜩 남편이 연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아주 깨끗하고 고귀하다. 자기 주변은 아무리 더러워도 고고하게 피어난다. 나의 남편은 짜장 연꽃 같다. 주변이 지저분해도 잘 버텨낸다. 다만 본인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은 참지 못한다. 어찌 됐든 본인의 몸은 청결해야 한다.
일례로, 본인이 먹고 남긴 음식물을 잘 치우지 못한다. 조금 전까지 본인의 음식이었던 것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 그는 그것을 정리하지 못한다. 단언컨대 그는 템플 스테이를 평생 해내지 못할 것이다. 발우공양을 해낼 수 없을 테니까. 그에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달라고 부탁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부탁이 멎을 때 즈음, 우리 집은 일찍이 음식물 분해기를 사두었다.
화장실 청소는 어떤가. 그가 완벽히 화장실 청소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 역시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한 번은 그에게 분사형 세제를 화장실 구석구석 뿌려달라고 부탁했었다. 잠시 후, 나는 공기권총 선수가 우리 집에 온 줄 알았다. 남편은 화장실 밖에서 선수처럼 왼발을 앞세워 섰다. 오른손은 본인의 바지에 찔러 넣고 왼손으로만 분사기를 잡았다. 특이한 점은 여느 선수들과는 달리, 그의 타깃은 바닥에 있었다는 것. 그는 화장실의 바닥을 향해 세제를 찍찍, 찍찍 뿌려댔다. (그나마 공기권총 선수는 쓸만할 때가 있어서 가끔 섭외한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참 동안 남편 연꽃 가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너의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내 앞에서 엄지와 집게손가락 끝으로 먼지 그득한 걸레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 이것 참 더럽다.’는 그의 표정은 필수옵션이었다. 오, 나의 연꽃이여.
남편과 2017년 제주도 여행 중에 찍었던 연꽃. 너를 써먹을 날이 올 줄이야.간밤에 마신 그 시원했던 물이 해골 물이었음을 깨달은 원효대사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는 바닥을 닦으며 이제야 남편을 알게 되었다는 묘한 쾌감이 들었다. 마치 생각의 키가 조금 자란 것 같았다. 청소로 인한 피로 누적으로 몸은 무거워졌지만 반면에 마음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허물을 한 꺼풀 벗은 셈이었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남편과 나의 남편을 비교해가며 스스로 얼마나 많은 업을 쌓았더냐! 부질없던 지난날들이여!
청소를 마친 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는 연꽃 같은 사람이라는 걸 내가 방금 깨달았어. 오빠는 주변이 아무리 더러워도 잘 버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미러링해도 끄떡없는 사람이야. 자기 손이 더 더러워지는 건 끔찍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야. 오빠가 완결성을 가지고 해낼 수 있는 일을 잘 생각해보고 내게 말해줘.”
남편은 알겠노라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한마디 거들었다.
“나를 꽃으로 여겨주는 사람은 우리 마누라밖에 없구나!”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날 밤을 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평화로운 주말을 보냈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바가지를 긁지 않았다.)
불만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달라지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당신은 끝내 화장실 청소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는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하지만 인제야 나는 우리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나는 당신을 보며 해골 물을 끊임없이 마실 것이다. 그리 번뇌하며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헌정하는 당신에 대한 보고서이자,
당신을 이해하려는 나를 위한 기록이다.
본격 남편 관찰 일지, 로투스(연꽃) 리포트.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