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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헌 Dec 06. 2023

인간과 숲

그 숲 속에서

다른 이들보다 약간은 독특하고 특별한 직업을 갖게 된 나는 자연스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직업 특성상 1년에 한 번은 근무지를 옮겨야 되기도 하고 나이대에 비해 많은 사람을 책임져야 할 권한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시절까지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개인보다는 집단에 초점이 맞춰진 규정과 규율 아래 살아왔고 그 덕택에 지금과 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죽도록 괴롭지는 않다. 타인을 위한 헌신과 배려는 사람들의 숲에서 좀 더 지혜롭고 영리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나만의 강점, 작은 습성이 되었다. 남을 위해 흘린 땀과 그로 인해 생기는 사소한 불편함, 그리고 선하다는 인상 덕분에 대다수의 사람들과 갚지는 않더라도 얕고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대체로 '착하다'라는 평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대면하는 각개의 사람들에게 1대 1로 맞춰진 페르소나를 만드는 것이 가끔은 깊은 회의감으로 점철될 때도 있었지만,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적당한 나만의 거리감을 알 수 있게 해 준 나름 성공한 시행착오였다. 비록 시간이 지나고 직장에서의 경험이 쌓일수록 집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야 할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고 언뜻 보면 보다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단지 조금 더 큰 톱니바퀴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반문하며 사람을 대하는 능력이 점차 향상됐다고 느껴질 때쯤 나의 말투와 행동에서 자만과 오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은 씨앗 하나가 발아하여 슬쩍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 작은 식물은 잡초와도 같아 정신과 행동을 금방 오염시킬 만큼 빠르게 뿌리내리기 때문에 적당히 쓴 제초제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중 하나는 첫인상이었다.


첫인상은 철대적이지 않았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사람의 인상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나타낸다라는 말이 있지만, 마주친 그 짧은 순간에 그 사람의 삶을 판단하기에는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빛과 색깔을  지녔는지의 판단은 대략적으로 할 수는 있을지라도 눈에 비친 그 빛조차도 스펙트럼을 통과한 태양빛처럼 가지각색의 빛을 머금고 있으며, 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의 깊이 또한 함부로 단정 짓기 어려웠다.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고 해서 운동을 좋아하지 않거나 방에 틀어박혀 유튜브만 보는 히키코모리는 아니며, 씩씩하고 자신감 있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여 외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소매 밑 손목에 그어져 있는 숨겨진 상흔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작은 세계 속에서 살기에는 너무도 연약해 보였던 청년이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작은 조직을 이끌어갈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기도 했으며, 처음부터 '에이스'라는 호칭이 붙으며 누구보다 열렬히 살아가던 이도 가정과 환경,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깊고 어두운 그늘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의 의미는 '독단적인 본인의 심술'로 풀이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 번째는 집단과 개인을 구분하는 능력의 부재였다.

집단의 성향은 집단에 속한 개개인의 성격의 합으로 이루어지며, 한 명의 행동거지는 집단의 대략적인 색과도 연관이 있었다. 집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체적인 흐름을 읽어야 하는 관리자 입장에서 각각의 집단은 한 명의 개인과도 같은 특색을 지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단을 현미경으로 미시적인 관점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성원들의 생김새는 물론 살아온 인생, 성격, 가치관, 말투 등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으나, 고장 난 망원경으로 보듯 한 발자국 뒤에서 관찰하다 보면 신기할 정도로 하나의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과 같이 보인다. 처음에는 작은 집단이 모이고 모여 커다란 군체를 형성하고, 그 군체들이 모여 더 커다란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마냥 신기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무와 밤나무를 하나의 같은 숲으로 인식할 때를 경계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 필요한 물의 양, 햇빛의 정도, 거름의 종류 등은 모두 상이하지만 피어난 이파리의 색은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숲의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오만함은 숲 속에 있는 시든 나무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씨앗을 보며 이 나무가 얼마나 넓은 그늘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나무의 색을 숲의 전체적인 색으로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간의 숲에서 살아가는 나 또한 나무 한그루에 불과하며 숲을 조망하는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이 허망함과 공허함에 빠지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안간힘을 서며 뿌리를 내리려는 작은 씨앗들을 보며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던 것 같다. 서툰 인간들 사이에서 한숨과 가쁜 숨을 쉬며 투쟁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간 존재의 이유와 역설에 대해 고심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답을 찾을지도 사실 미지수이다. 평생 그 진리를 찾기 위해 온 숲을 뒤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지만 대략적으로 숨겨진 위치를 찾을 가능성이 있는 직업을 갖게 되어 가끔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고 배워야 할 것은 넘쳐나지만 하루하루 겸손함과 온화함을 유지한 채 살아가길 지향한다면 어느 순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나는 오늘도 인간의 숲 속에서 인간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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