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까이 있는 것들
쵸코의 산책을 기다려주는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일도, 누군가의 꿈을 지켜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비나 눈이 오지 않는 날이면 쵸코와 함께 집을 나선다. 쵸코에게 산책은 단순히 걷는 일이 아니다. 세상의 냄새를 맡고, 자기 구역을 확인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시간이다. 나이 든 노견이지만, 쵸코는 여전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냄새 하나에도 멈춰 서고, 바람이 스치는 풀잎에도 코를 들이민다.
그런 쵸코를 기다리다 보면 답답할 때도 있다. 시간은 흘러가고, 서둘러야 할 일들을 떠올리며 발끝이 조급해진다.
하지만 예전에 발톱이 깨지는 상처를 입힌 일이 있어 이제는 함부로 끌어당기지 못한다. 그때의 미안함이 내 손을 붙잡는다. 결국 쵸코가 마음껏 냄새를 맡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들 때까지 나는 묵묵히 기다린다.
쵸코의 걸음은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엔 삶의 리듬이 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향하는 그 모습은, 언제 봐도 고집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런 쵸코를 보면 문득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도, 아이의 성장도, 꿈을 이루는 길도 결국은 이렇게 ‘자기 속도’를 지켜가는 과정이 아닐까.
처제가 셋이라 아직 어린 조카들이 여럿인데, 요즘은 그 아이들과의 대화가 작은 즐거움이 된다. 중학생 또래의 조카들을 만나면 학교생활은 어떤지, 공부는 재미있는지,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묻곤 한다. 어릴 적 수없이 들었던 질문들을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건네는 셈이다.
한 조카는 대중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벌써 믹싱 콘솔을 다루며, 작곡과에 진학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또 한 조카는 아이돌 가수를 꿈꾼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눈을 반짝인다. 다른 조카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 말에도 나는 괜찮다고, 천천히 찾아가면 된다고 말해준다.
아이들의 꿈을 듣고 있으면 참 대견하다. 요즘 아이들은 꿈에 대해 훨씬 구체적이고, 그 길을 이루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나 어릴 적에는 ‘꿈’이란 그저 막연한 소망에 불과했는데, 이제 아이들은 구체적인 목표와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길을 그려간다.
부모들도 그런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기 위해 애쓴다. 영어, 수학은 기본이고 음악, 미술, 스포츠, 여행까지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려 한다. 그런 노력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열심이 아이의 꿈이 아니라 부모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강남 어딘가에서는 의대 진학을 위해 유치원 과정부터 다르게 운영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쯤 되면, 과연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된다.
맹자에는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고사가 있다.
옛날 송나라의 한 농부가 싹이 자라지 않는다며 걱정하다
그만 싹을 뽑아 올려놓고는 “이제 잘 자라겠지” 하고 자랑했다. 하지만 다음 날, 그 싹들은 모두 시들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 누군가의 꿈을 지켜보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조급함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지만, 그 사랑이 지나치면 싹을 시들게 할 수도 있다. 어른의 바람이 아이의 꿈을 덮어버리는 순간, 그 꿈은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다.
쵸코와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한다.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존재가 자기 걸음을 다 걸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쵸코가 냄새 하나에도 머물 듯, 아이들도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을 배워가야 한다. 그 느림을 지켜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쵸코는 오늘도 느리게 걷는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배운다.
사랑이란 결국 기다림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 기다림에는 조급함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