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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땅에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알제리,지드,카뮈

by 스토리아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하나인 오아시스 도시 비스크라를 떠났다. 자동차는 넓고 넓은 황무지를 한없이 달렸다. 안내하는 알제리인 친구 함마디 씨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우리를 내리게 하더니 말했다. 저기가 호수입니다. 흰색 물감의 가벼운 붓 터치가 여기저기 지나간 붉은 땅이 저 멀리까지 펼쳐 있었다. 이렇게 메마른 땅에 호수?

물은 어디에?


겨울이 되어 북쪽 사하라-아틀라스 산맥에 비가 내리면 사하라에 물이 흘러들어 고이며 넓은 호수가 생긴다. 한 때 사막이 바다였던 태고로부터 물려받은 소금기가 물에 녹아든다. 고여 있는 소금물은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사막의 빛과 열기로 빠르게 날아가 버린다. 겨울 한 계절만 물이 차고 나머지 9~10개월은 소금 벌판이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희끗희끗한 터치는 말라 붙은 소금 자국이다.

물이 차있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고 너무 얕아서 뛰어들어 헤엄칠 수도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다. 물가에 앉아 낚싯대를 늘어뜨리고 낚아 올릴 물고기도 없다. 짠물에는 생물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수라고 불러야 할까?


큰 소금 호수를 ‘쇼트‘ 라고 부른다. 알제리에서 가장 큰 ‘멜히르 쇼트’는 면적 6,700㎢, 즉 서울 면적의 10배 정도 된다.작은 소금 호수를 ‘세브카’라고 하는데, 알제리 서부의 항구 도시 오랑에 인접한 내륙 쪽에 있다. 도시 오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에 올라가면 한쪽에는 푸른 지중해가 펼쳐져 있고 다른 쪽에는 수면을 반짝이는 소금 호수가 보인다. 도시가 소금물 사이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면 입속에 소금을 가득 문 것처럼 깔깔해진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소금기가 삭아 못쓰게 하는 공항 활주로처럼 입안이 헐어버릴 것 같다.


강을 본 적이 있을까? 동서로, 남북으로 수많은 여정을 다녔지만 물줄기는 딱 두 번 보았다. 알제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크산티나에 갔을 때 높은 다리 위에서 저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계곡의 급류 그리고 카빌리를 향해 가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보았던 강줄기가 기억에 남아 있다. 지도를 보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들이 여기저기 표시 되어 있지만대부분 겨울철 잠시 부풀었다가 말라 버리는 건천들이다.


알제리 지형은 동서축을 따라 세 벨트로 나뉜다. 제일 북쪽 지중해 해안가에는 좁은 평원로 군데군데 끊어지면서 이어지는 ‘텔 아틀라스’산맥이 뻗어있다. 두 번째 벨트는 고원지대 ‘오 플라토(Hauts Plateaux, 영어 High Plain)’다. 600킬로, 서울 부산 간 거리의 1.5배 거리에 길게 펼쳐진 고도 900m의 높은 고원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짧은 풀들이 자라는 스텝 지대로 가축을 데리고 풀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의 땅이다. 고원지대는 ‘사하라-아틀라스’ 산맥을 경계로 끝난다. 산맥을 넘으면 광활한 사하라 사막이다. 비가 내려 나무와 풀이 자라는 곳은 첫 번째 벨트뿐이다. 전 국토의 10%에 해당하는 이곳에 알제리 인구의 80%가 모여 산다. 대도시들도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해안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아 비가 오는 구간이 끝나기 때문에 알제리의 강은 길이가 짧고 흐르는 물의 양이 많지 않다. 비가 올 때만 물이 불어나 탁한 물이 흐른다. 알제리에서 가장 긴 쉘리프는 평시 초당 유량이 49㎥이고 숨맘은 25㎥다. 서울 한강의 유량 670㎥에 비교하면 얼마나 작은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우기에는 전혀 달라진다. 겨울이 되어 대서양으로부터 저기압이 몰려와 비가 내리면 유량이 삽시간에 1,500㎥까지 늘어나 주변을 휩쓸어 가버린다.

건기와 우기의 유량 차이가 그렇게 크고, 많은 구간이 경사가 심한 급류로 되어 있어 강에 배를 띄우지 못한다. 배를 만들어 타고 건널 수도 없고 뗏목을 만들어 짐을 실어 나를 수 없다. 인적 물적 통로가 될 수 없는 강이라니!


호수도 강도 메말라 있는 건조한 나라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늘 궁금했다. 아침에 깨어나 창문을 열면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햇빛만 일 년 내내 볼 것이 아닌가? 갑자기 퍼붓는 여름 소나기나 하염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를 맞아 볼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축축한 습기가 코로,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가라앉는 듯한 기분, 물기에 흠뻑 젖어 풀어지고 늘어지는 기분, 어디도 가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우울한 기분을 모를 것이 아닌가?


젖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맨 몸으로 밖으로 뛰어 나갈 수 있는 자유로움이 머리칼이나 옷을 적시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특권적 정서가 아닐까? 내리는 비를 보며 감상에 빠지기도 하지만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기도 했던 내가 유추한 생각이었다. 내가 읽었던 알제리를 배경을 한 몇몇 작품들도 그렇게 말했다. 구속이나 부담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과 감각이 우선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앙드레 지드의 소설 <부도덕한 사람> 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알제리도 그랬다. 여행을 하던 도중 병에 걸려 초주검 상태로 사하라 오아시스 비스크라에 도착한 주인공 미셀은 태양빛과 맑은 공기 속에서 차츰 건강을 회복한다. 이 과정에서 종교와 교육이 자신의 삶을 억압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감각적 환희로 충만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느낌으로 외친다.


“이제는 오아시스보다 사막이 좋다. 죽음으로 이끄는 영광과 견딜 수 없는 찬란함의 땅 거기서 인간의 노력은 추하고 가엾어 보인다. 이제 다른 모든 땅은 내게 지루하다.”


프랑스 작가가 그렇게 감격적으로 서술한 감성적 발견을 알제리 사람들도 공유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건조한 공기와 메마른 땅에 사는 피로와 고단함이 더 많이 보였다.

너무 강한 빛은 눈을 찌르고 너무 강한 열기는 지치게 했다. 몸은 고달프고 정신은 마비되었다. 해방감과 정신적 흥분은 늪, 호수, 강… 움푹 들어간 곳마다 물이 고여 흐르는 물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노르망디 사람들이 느꼈던 일시적 감상일 뿐이었다.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로 들어가면 일하지 않는 남자들이 보였다. 야윈 나무 아래 그늘 맨바닥에 누워 있거나 흙벽에 기대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힘에 넘쳐야할 젊은이들도 비슷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모래빛으로 물든 흰색 옷을 털고 앉아 빵과 야채로 소박한 끼니를 때우고 다시 원래 자세로 되돌아갔다. 모래 바람이 부는 헐벗고 텅 빈 공간, 계절이 바뀌지 않으니 느리게 흐르는 시간, 그 시공간 속에서 나른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 파리와 노르망디로 돌아갔다가 비스크라에 다시 와 정착한 미셀은 권태감을 토로한다.


“이 완강한 푸른 하늘만큼 정신적 의욕을 꺾는 것은 없다. 여기서 정신적 활동은 불가능하다. (…) 단조롭게 긴 하루 그리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한가로움을 숨기기 위해 한낮에 자리에 눕는다.”


메마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가까이 가도 선뜻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화를 내는 일도 없고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더위도, 건조 함도, 메마른 땅도 불평하지 않았다. 생존하기 어려운 극한 환경은 그들을 체념하게 하고 침묵하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화도 없이 위안도 없이“ 사는 그들에게 ”인생은 건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연소시켜야 할 대상이다.“


알제리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일까? 작가 알베르 카뮈의 구절이 더 마음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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