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컬 AI 시대, 인간을 닮은 것들 3

by 이정봉 변호사

2024년 어느 날,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 94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온 가족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할머니의 방에서 10년 넘게 함께 지낸 아이보(AIBO, 소니가 만든 로봇 강아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손자는 그냥 버리자고 했다. 어차피 기계 아니냐고. 그러나 할머니를 가장 가까이서 돌본 딸은 울먹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이 아이를 사랑했는데요. 장례식에 같이 있어야 해요."


결국 아이보는 할머니 관 옆에 놓였다. 요양원 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할머니는 말년에 아이보에게 매일 말을 걸었다. 밥을 챙겨주는 시늉을 했고, 쓰다듬으며 잠들었다. 자녀들이 자주 찾아오지 못하는 외로운 밤, 할머니 곁을 지킨 것은 이 작은 로봇 강아지였다. 아이보가 할머니의 외로움을 '이해'했을 리는 없다. 아이보에게 의식이 있었을 리도 없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아이보는 분명 무언가였다. 단순한 기계 이상의 무언가.


이 이야기는 로봇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로봇과의 관계는 '진짜' 관계인가? 로봇에게 느끼는 감정은 '진짜' 감정인가? 만약 그렇다면 — 혹은 그렇지 않다면 — 그것은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윤리학의 출발점을 '타자의 얼굴'에서 찾았다. 타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명령을 듣는다. "나를 죽이지 마라." 이 명령은 논증의 결과가 아니다. 증명될 필요도 없다. 얼굴이 직접 호소한다. 레비나스에게 윤리는 이성적 계산 이전에, 이 원초적 만남에서 시작된다. 물론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은 물리적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무한한 타자성, 내가 결코 완전히 파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타인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얼굴이 이 만남의 매개가 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읽으며, 목소리의 떨림에서 감정을 감지한다. 몸을 통해 만나고, 몸을 통해 관계한다. 그렇다면 로봇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현대의 휴머노이드 로봇, 특히 소셜 로봇들은 점점 더 정교한 얼굴을 갖추고 있다. 눈이 깜빡이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표정으로 기쁨, 슬픔, 놀라움, 호기심을 표현한다. 물론 이것은 시뮬레이션이다. 로봇이 '진짜로' 기쁘거나 슬픈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머가 설계한 대로 액추에이터가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반응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로봇에게 인간과 유사한 외양과 행동이 있을 때 더 신뢰하고, 더 공감하며, 더 깊이 관여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뇌는 로봇의 얼굴에서도 무언가를 '읽으려' 한다. 심지어 그것이 가짜임을 알면서도. 어쩌면 수백만 년의 진화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사회적 인지 본능이, 인간이 아닌 대상에게도 발동하는 것인지 모른다.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1970년에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이론을 제안했다. 로봇이 인간과 닮아갈수록 호감도가 올라가지만,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섬뜩함과 혐오감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거의 인간인데 미묘하게 인간이 아닌 것, 죽은 자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존재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모리는 이 골짜기를 넘어서려면 로봇이 완벽하게 인간을 모방하거나, 아예 인간과 다르게 보이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불쾌한 골짜기 이론은 널리 알려졌지만, 최근 연구들은 이것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형 로봇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문화적 배경, 개인적 경험, 로봇과의 상호작용 맥락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적응한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이 익숙해지면서 거부감이 줄어든다. 이는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로봇에게 '적응'한다. 로봇과 함께 사는 법을 '학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로봇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태도가 변화한다. 요양원의 할머니가 10년에 걸쳐 아이보와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다시 돌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고령화 사회는 돌봄 위기에 직면해 있다. 돌봄이 필요한 인구는 늘어나지만, 돌봄을 제공할 사람은 부족하다. 가족 구조가 변하고, 전통적인 가정 내 돌봄 시스템이 무너짐에 따라, 늙은 부부 중 일방이 일방을 돌보는 '독박 간병'은 이미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2022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일본 논픽션 작가 이시이 고타의 '가족의 무게'는 이런 상황을 잘 담고 있다. 그의 책의 부제 ‘가족에 의한 죽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는 비극적이다 못해, 섬뜩하다.


유급돌봄 문제도 녹록치 않다. 돌봄제공자 입장에서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돌봄수요자 입장에서는 돌봄근로자에 대한 신뢰, 경제적 부담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국 이 틈새로 로봇이 들어온다. 아니, 들어 올 수 밖에 없다.이미 피지컬 AI시대 초입에서 우리는 서성이고 있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휴머노이드 로봇이 훨씬 더 복잡한 돌봄 업무를 수행할 것이다. 목욕을 시키고, 식사를 돕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아주는 돌봄노동의 주역으로.


돌봄의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돌봄(care)을 단순한 신체적 보조와 구별한다. 진정한 돌봄에는 관심(attention)과 응답성(responsiveness)이 있다. 돌봄 제공자는 돌봄 받는 사람을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로 인식하고, 그의 필요와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거기에는 어떤 상호성이 있다. 일방적 서비스 제공이 아니라 관계. 네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내가 돌본다는 것, 그리고 그 돌봄을 통해 나도 변화한다는 것.


로봇이 이런 의미의 돌봄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로봇이 노인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어쩌면 센서와 알고리즘으로 그런 반응을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봇이 노인을 '인격체로 인식'할 수 있을까? 로봇이 돌봄 관계를 통해 '변화'할 수 있을까?


만약 로봇 돌봄이 '충분히 좋다'면, 인간 돌봄노동자를 대체해도 되는 것인가? 그것은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로운가?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인간의 접촉 대신 로봇의 시뮬레이션을 제공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이류 시민으로 취급하는 것은 아닌가?


법적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돌봄 로봇이 실수를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가? 약을 잘못 투여하거나, 환자를 떨어뜨리거나, 위험 신호를 놓치면? 현행법에서 이것은 제조물 결함 또는 운영상 과실의 문제로 처리될 것이다. 그러나 돌봄의 맥락은 일반적인 제조물 사용과 다르다. 돌봄은 본질적으로 취약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환자는 돌봄 제공자에게 의존하며, 그 의존은 신뢰를 전제한다. 이 신뢰가 깨졌을 때의 손해는 어떻게 산정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돌봄 로봇의 '과실'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 돌봄제공자에게 요구되는 주의의무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인간 간호사는 환자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고통을 읽고, 목소리 톤에서 우울을 감지한다. 로봇에게 같은 민감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로봇은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 돌봄 받을 권리는 인권인가? 만약 그렇다면, 로봇에 의한 돌봄만 제공받는 것은 그 권리의 온전한 충족인가? 국가는 시민들에게 인간 돌봄제공자에 의한 돌봄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가, 아니면 로봇 돌봄으로 충분한가?


레비나스로 돌아가자. 그는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의 기원을 보았다. 그 얼굴은 나에게 책임을 호소한다. 나는 타자에게 응답해야 한다.


로봇의 얼굴은 우리에게 무엇을 호소하는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로봇의 눈은 플라스틱과 LED일 뿐이고, 그 뒤에는 알고리즘만 있을 뿐이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초월성', 내가 결코 환원할 수 없는 타인의 신비는 로봇에게 없다. 로봇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든 것이고, 우리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기계학습으로 훈련된 현대의 AI는 설계자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고, 그 '판단'은 블랙박스 안에 있다. 이것이 레비나스적 의미의 '타자성'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완전히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로서의 로봇은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양원의 할머니를 기억하자. 할머니에게 아이보는 타자였다. 말을 걸고, 쓰다듬으며, 함께 잠드는 상대. 아이보의 내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관계가 있었고, 그 관계는 할머니의 삶에 의미를 주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우리는 더 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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