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전시 소개

nowhere, everywhere_안소정 작가

Artist Interview

by 넷플연가

“나와 내 혼란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해줘

나와 내 수치감 사이에 대서양 전체를 넣어줘”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中



나에겐 향수와 외로움으로 기억되고 있는 그 장소가,

누군가에겐 겹겹이 엉켜있는 나쁜 기억들을 풀어내는 곳으로

아침 출퇴근길에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곳이기도

여행과 공항이란 단어가 주는 묘한 이미지들이 신기해져서

알랭 드 보통은 일주일이 나 공항에 있었더랬다




여행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캔버스를 채우고 있다. 작품을 보자마자 으레 공항이란 단어가 안겨주듯 기대, 설렘이 느껴졌다.

이 그림에 대한 첫인상이 여행을 향한 기대와 설렘이길 바라며 그린 것이 맞아요. 사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정서는 대체로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여행과 뗄 수 없는 공간인 공항이 주는 분위기도 자연히 그런 감정들과 연결이 되지요. 그렇지만 그런 밝고 컬러풀한 공항을 그리는 동안 제 기분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되는 것이었어요. 저는 당시 오랜 떠돌이 생활로 지쳐가고 있었거든요. 너무 외롭고, 피곤하고, 짐이 무겁고.. 여행지에서 어쩌다 우연히 멋진 것을 발견해도 그 순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집이 그리워졌고, 이제 여행을 끝내야겠다는 결심이 들어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첫인상은 밝고 희망차지만, 좀 더 보다 보면 왠지 모를 고독감이 밀려오는 이상한 공항의 풍경을 그리고 싶었어요.


떠돌면 정착하고 싶고, 정착하면 떠나고 싶은
내면의 아이러니를 자조하며 그린 것이기도 하고요.


일정한 간격으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익명의 사람들이 인상적이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골콩드(부제 : 겨울비)의 느낌도 받았다.

‘여행이 신난다’고 느낀 것도 공항이지만, ‘여행이 지긋지긋하다’고 처음 느낀 것도 공항이었어요. 비행기 티켓을 환불해버릴까 고민하면서 게이트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 보니, 처음으로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할 여유가 생겼어요. 매우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목적지를 향한 비행을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저들은 무엇을 하러 어디로 떠나는 걸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저런 사연들이 궁금해지다가 다시 홀로 울적하게 앉아있는 제 자신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이렇게 수많은 여행자들이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스쳐가는 이 공항에서 나 혼자만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더 이상 여행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자화상을 수많은 익명의 여행자에게 대입한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각자 무엇을 하러 어디로 떠나는지 알 수 없이, 어디 선가에서 와서, 공항을 잠시 스쳐 또다시 어디론가 가는 유령 같은 여행자들. 언급해주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도 물론 영향을 주었어요. 누구에게나 대체로 보편적인 이미지를 가진 공항이라는 공간에 그런 초현실주의의 낯선 느낌을 부여하고 싶었어요. 그리던 당시에 의식하고 그렸다기보다는 은연중에 그렇게 흘러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아요.


골콩드_캔버스에 유채_80.8x100.6cm


현대 사회가 박탈한 도시인의 개성을 표현한 듯한,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지만
모두 조금씩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는 신사들이 비처럼 내리는 작품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르트 <골콩드>


작업 과정이 어떻게 되나? 어떤 인상 깊은 순간을 기억하고 진행하는 건지?

특별히 설명할 것도 없이 굉장히 즉흥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회화라는 장르에서 제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이 그리기 전에 포맷(사이즈)을정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라서, 초반에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을 오래 하는 편입니다. 캔버스를 다 짜고, 밑 작업을 다 마친 뒤에서야 뒤늦게 그 사이즈가 최선이 아니라는 후회가 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새하얗게 밑 칠이 된 캔버스가 자꾸 쌓여가고, 짐이 계속 늘어나는 게 좀 피곤한 일이에요.

유화보다는 아크릴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루고, 물성 면에서도 선호하기 때문에 아크릴화를 더 많이 그리고요. 배경을 80% 이상 완성에 가깝게 정돈한 후에 세부적인 개체나 인물 등을 그 위에 그려나갑니다. 포토샵에서 레이어를 쌓아가는 듯한 작업 방식이고, 작업 기간은 길지 않은 편이에요. 성격이 급해서 단기간에 작업하고 오래 쉬는 편입니다.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는 전달하고 싶은 감정, 기억, 정서 등을 대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다니면서 작업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문학에서처럼 비유와 은유로 쓸 만한 소재를 찾고, 그것들이 나 대신 이야기를 전달해주길 바라며 그려요.


https://vimeo.com/129973706

작업 과정


Nowhere와 Everywhere 시리즈의 작업은 전혀 다른 계기로 시작한 작업 같다. 지향점도 다른 것 같고.

‘여행이 귀찮아짐’을 겪은 그 날, 나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일까. 왜 이 외로운 여행을 그동안 계속해왔을까 하는 허무가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할 만큼 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여행에서 돌아와 귀국을 준비하는 동안 꾸역꾸역 그려나간 것이 ‘Nowhere’ 시리즈입니다. 꾸역꾸역 그렸다는 표현을 썼지만, 정신적으로는 일시적이나마 큰 위로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해요. 마치 도를 닦듯, 한 사람 한 사람 그려나가는 과정이 나름의 힐링이 되었었나 봐요. 교환학생으로 잠시 머물렀던 영국의 한 대학, 춥고 휑한 작업실에서 고요히 작업을 하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외로운 여행자들을 한 명 한 명 그리며,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어서 집에 가자,라고 계속 되뇌었습니다.

결국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집은 무한한 휴식과 무한한 따뜻함을 주었고, 이곳에서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기에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잘 스며들어 안도감을 느꼈고, 누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지겨웠던 외로운 여행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떠나지 못하면 떠남을 그리워하고, 떠돌 때는 따스한 집이 그리워지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했고, 서서히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Everywhere travelers’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두 시리즈 사이에, 시간과 정서의 큰 간극이 있는 거죠. 그런데 결국 그 두개의 극은 맞닿아있는 것 같지 않은가요? 떠남과 정착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것 같아요.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中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있나? 그 작품 안에 담긴 이야기도 궁금하다.

프랑스에서 돌아와서 다시 모국에 ‘재적응’을 하는 기간에 구상하게 된 게 ‘섬’ 시리즈인데요, 그 시리즈의 모태가 된 습작 그림입니다. 광화문 한 복판에서 매우 바빠 보이는 서울 사람들 틈에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불현듯 그들과의 엄청난 괴리감을 느꼈어요. 이들은 일터로 바삐 걷는 것 같은데, 저 신호등이 바뀌면 나는 어디로 바삐 걸어야 하지? 하는 초조와 당혹감이요.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의 당혹감이 그로부터 바로 몇 달 전 공항에서 느낀 허무와 고독과도 비슷한 경험이었던 거네요. 당시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흔히 쓰이는 표현인 ‘잉여’라는 말이 딱 그때의 저를 가리키는 것 같아요. 난 내가 잘 아는 도시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떠돌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고, 이왕 잉여로울 거면 그림 속에서는 더 말도 안 되는 놀이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 순간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던 광화문의 보행섬이 바다 위의 고립된 섬 같다는 느낌도 들었었고요. 저는 제 삶이 비교적 평화롭고 굴곡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가 저에게 몇 안 되는 우울한 방황의 시간이었기도 해서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은 이 습작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섬.jpg 섬 시리즈


긴 여행이어서 그런지 흔히 여행지에서 느끼는 설렘, 즐거운 낯섦 같은 감정보다 노스탤지어, 지친 기색이 많이 느껴진다.

이제는 그런 유목민적인 생활을 접은 지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여행은 다시 저에게 fresh 한 정서를 담고 있는 전형적인 무언가로 돌아왔어요. 저의 삶에서 여행이 기존에 가져다주던 에너지가 회복된 느낌이랄까요? 그런 변화가 ‘Everywhere travelers’ 시리즈에도 드러나게 된 거고요. 다음 여행은 혼자 가도 고독을 느낄 새 없이 충분히 재미있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요.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나기는 쉽지 않아졌죠…. 일이 많아 바쁘기도 하고, 가족도 있고, 저의 귀가만을 기다리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고…. 정신을 차려보니 몇 년 사이에 제 삶을 일정한 곳에 정착하게 하는 굵직한 이유들이 생겨 버려 서말이죠. 지금도 충분히 좋아요. 떠돌던 그때의 저도 좋고요. 훌쩍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부러워지는 순간도 물론 있지만요. 아직은 참을 만해요



작가로서는 요즘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스토리 펀딩에 연재한 <누워서 미술 먹기> 프로젝트도 인상적이었다.

저는 한 분야에 깊게 골몰하기보다는 이것저것에 관심을 가지고 두루두루 건드려보는, 주위가 대단히 산만한 사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잡기가 생겼어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내가 좋아하는 미술하고 살자고 아버지의 등골 브레이커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겠다는 자각이 들어서 경제적 독립을 선언했는데, 처음엔 정말 막막했지만 지금은 제가 그동안 산만하게 키워온 미술적 잡기를 발휘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여러 가지 생겼고 또 안정적으로 꾸준히 하는 일들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뮤직비디오나 광고의 미술 연출도 해보고, 미술 가르치는 일도 하고, 간간이 일러스트나 디자인 소일거리도 받아서 해요. 아트 마켓에서 초상화 그리는 이벤트도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히 하고 있는, 제가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입니다. 다만 순수하게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줄어들어버렸기 때문에, 새해에는 일을 조금 줄이고, 밖으로 나도는 시간도 줄이고, 작업에 깊게 몰두하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고 싶어요.

스토리 펀딩도 저의 문어발식 생산 활동의 일부였는데, 여전히 미술이 낯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다가 친구와 벌이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미술을 하는 우리가 미술을 지속하기 어려운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미술을 편하게 즐기는 대중이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미술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어른들을 위한 글을 daum에 연재하고, 공감해주시는 분들의 후원을 받아서 어린이를 위한 미술책을 만들었죠. 기획과제 작은 어찌어찌 셀프로 다 했는데,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 마케팅 수완이 둘 다 0인 거예요. 작업실에서 자기 세계만 만들어나가던 애들이 장사 노하우가 어디 있겠어요. 시장을 너무 만만히 봤어요. 그래도 겨우겨우 온 오프라인 서점에 입점하여 조금씩 판매를 해 나가고 있답니다.


빈센트 작업실.jpg <빈센트 반 고흐의 작업실에 놀러갔어요!>는 어린이를 위한 미술 도서!



그럼 앞으로도 작가님의 작품들도 지금까지와 비슷하게 작업되는 것인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해나가고 싶은지 궁금하다.

본의 아니게 1년 정도 휴지기를 가지게 된 ‘섬’ 시리즈를 이어서 그려나가고 싶고, 현재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회화를 그나마 가장 자신 있어하지만, 오히려 거의 극과 극 수준으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는 영상 촬영장에서의 공간 연출하는 일 또한 저 나름의 회화적 감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만약에 또 기회가 생긴다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가까운 계획으로는 2016년 5월에 프랑스의 낭뜨라는 도시에서 그룹 전시가 있어요. 잘 준비해서 좋은 작업 선보이고 싶어요. 주제는 기존에 다루던 이야기이되 새로운 그림을 완성해서 가져가고 싶습니다. 좀 더 먼 계획으로는 남편과의 프로젝트를 막연히 그려보고 있어요. 남편은 영상을 하는 사람인데,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면 제가 혼자 하는 것을 몇 배로 뛰어넘는 근사한 작업이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막상 착수하면 싸우기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저는 이것저것에 다양하게 손을 대고 생각도 산만해서 작업 또한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와 매체들을 다루게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015년에 중요한 몇 가지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꼭 작업에 녹여내고 싶어요.




인터뷰와 함께한 안소정 작가님의 작품은 '성수동 Les Philosophies'에서 12월 30일 수요일부터 1월 12일 화요일까지 커피 한잔과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작품은 직접 보는 감동이 있습니다.

http://7pictures.co.k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전시 스케치> 상상, 환상, 유토피아를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