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유의 맛

by 선희

얼마 전 친구의 갓난 아기를 잠깐 안아주었는데 그 때 풍겼던 달콤한 냄새에 내가 분유의 참맛을 알게 된 일이 떠올랐다.


우리 집 맞은편엔 나와 이름이 같고 성씨만 다른 3살 위의 언니가 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동안에는 그 언니가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언니는 좀 위험한 놀이를 좋아했다. 키보다 높은 담장에 올라가서 뛰어내린다거나 동네에 있는 기다란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브레이크 없이 내려오기도 했다. 그대로 어디 처박혀서 다치는 일이 많았고, 덕분에 온몸에 상처가 없는 날이 없었다. 위험했지만 너무 자극적이고 재미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계집애들이 선머슴 같다고 얌전히 좀 놀라고 했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둘 다 성격이 괄괄하고 활동적인 것도 닮았던 우리는 그런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는 듯이 항상 온 동네를 뒤집고 다녔다.


실컷 놀고 나면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밥을 먹는 것이 루틴이었다. 그때 마당에서 키우던 똥개를 데리고 같이 산책도 종종 했었다.

3학년의 봄방학 어느 날 언니랑 어김없이 실컷 놀다가 배가 고파졌다. 밥 먹기 전에 먹자며 과자를 사러 동네에서 나름

큰 슈퍼마켓에 갔다.


나는 짠 과자를 엄청 좋아해서 포테토칩이랑 자갈치, 새우깡 같은 과자를 주워 담았다. 과자를 계산하고 보니 언니는 이미 밖으로 나가서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같이 가!!!!’하고 따라가보니 뜬금없는 분유 한 통이 언니 품에 있었다.

‘웬 분유야?’ 하니 자기가 분유를 엄청 좋아한다고 했다.


그렇구나 하고 같이 우리 집으로 갔다.


언니가 분유는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면서 가루를 그대로 한 수저 크게 떠서 입에 털어 넣고 녹여먹는지 씹어 먹는지 모를 모양으로 우물우물 먹었다.

너도 먹어보라며 한 수저를 주길래 냉큼 받아 먹어봤다. 목이 막히는 것 같으면 우유를 조금만 머금어서 넘기라고 했다.

입을 가득 채운 분유를 혀로 누르니 꼭 눈 밟는 것 같은 뽀드득 소리가 나면서 달고 고소한 향이 화악 퍼졌다. 너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언니는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언니를 보며 웃었다.


그렇게 달달한 분유와 짭짤한 과자로 이룬 무한 단짠의 황홀함에 빠져들어 한참을 먹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엄마가 유치원에서 동생을 데리고 시장까지 봐서 집에 돌아왔다.

언니는 그날은 배가 부르다며 같이 저녁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장 본 재료들을 풀어놓으며 식탁에 있던 분유통을 보고 웬 거냐고 물으셨다. 앞 집 언니가 이렇게 먹으면 맛있다고 알려줬다며 신나게 자랑을 했다.

엄마는 웃으며 ‘분유 맛있지. 씻고 나오면 밥 먹자’하시고는 동생을 목욕시키러 욕실에 들어가셨다.

동생과 엄마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 때 정말 좋아하던 전설의 용사 다간이라는 만화를 보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갑자기 누가 대문을 엄청나게 두드리며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야 나와!!‘

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빽 질렀고 엄마도 그 소리에 놀라서 동생을 씻기다 말고 부랴부랴 대문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쪼르르 따라나가 조금 거리를 두고 대문이 열리는 걸 지켜봤다. 그 곳엔 슈퍼 주인아주머니가 계셨다.


엄마가 아주머니에게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문을 부서지도록 두드리시냐 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갑자기 갑자기 도끼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버럭 하며 ’애 교육 똑바로 시키세요. 쟤가 우리 가게에서 분유를 훔쳐 갔어요!‘라는 것이 아닌가.

엄마가 바로 뒤를 돌아보며 ’너 저 분유 훔친 거야?‘ 라고 물어보는데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앞 집 언니가 가져온 것이고 나는 아까 과자밖에 안 샀노라고 호소하는데 애꿎게 혼나고 있자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엄마는 왜 우리 애가 그랬을 리 없다고 오해일 거라고 하지 않고 나에게 훔쳤냐고 따지듯 물어보는 거야?’하는 마음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주머니가 이미 앞 집에는 갔었다며 앞집에 사는 큰 애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는 거다.

나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정말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우다다 뛰어나가 눈물을

닦으며 애타는 마음으로 앞 집 문을 두드렸다.

‘언니! 언니! 이거 내 거 아니잖아! 언니 거잖아!’


열리지 않는 문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만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니가 아까 가지고 나왔잖아! 나 끌어들이지 마!‘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는 마당에 있는 작은 수전에 꽂혀있던 초록색 고무 호스를 뽑아들었다.


이내 호스가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공중을 가르며 슬로모션으로 휘어지더니 내 허벅다리에 달라붙었다.


나는 여러 종류의 매로 맞아본 나름 매 전문가인데 고무 호스가 아프기로는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굉장히 탄력이 좋아서 채찍처럼 몸에 촤악 감겼다가 떨어지는데 그 자리는 운 좋으면 퉁퉁 붓는 정도고 잘못 맞으면 터지기도 한다.


그 날은 아주머니 보란 듯이 정말 세게 맞았다. 허벅지와 종아리에 새빨갛게 줄이 생기고 살이 터서 피가 조금 올라온 부분도 있었다. 그렇게 네 다섯 대 정도 맞자 아주머니가 나서서 달려들어 말렸다. 그냥 분유값만 달라고 애를 잡으려고 하냐면서.

난 거의 혼이 나갈 것처럼 울었다. 아프고 무섭고 억울했다. 분유의 달콤함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인생 첫 배신의 매운 맛을 알아버렸다.


뭘 잘했다고 우느냐는 엄마의 말에 꺽꺽대며 울음을 참았다.


아주머니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분유 값을 내주고 집에 들어와 엄마는 다시 나를 채근했다.

나는 정말로 아니라고 분유는 언니가 들고나왔길래 계산한 줄 알았다고 그리고 내가 산 과자는 돈도 다 냈다고 눈물과 함께 억울함을 토했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엄마는 앞집에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집에 돌아와서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누워있는 나를 안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언니가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했단다.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으니 나를 너무 혼내지 마시라고 하면서 분유값은 돌려드리겠다며 울었다고 했다.


그날 밤에는 엄마도 내 다리를 보면서 울었다.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하며 연고를 발라주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은 뜨거운 상처에 닿은 약과 함께 금세 녹아내렸다.


이후 몇 번인가 언니가 대문 앞에서 나를 부른 적이 있지만 보고싶지 않았다. 집에 있어도 없는 척 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언니네는 이사를 했다. 집이 망했고 부모님이 이혼을 해서 따로 살게 되었다고 들었다. 한 때의 베스트 프렌드를 모른 척 해서 생긴 죄책감은 나에게 누명을 씌운 탓이라며 애써 외면했다. 그 후로는 언니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걸 나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던 언니가 짠했다. 그렇게 갑자기 이사를 갈 줄 알았더라면 인사라도 했을텐데 하는 자그마한 후회도 들었다.


품에 안은 아기 등을 톡톡 두드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언니는 아이를 낳았을까? 혹시 아이에게 분유를 먹일 때 그 날이 생각났을까?

그렇다면 그저 그날 낮, 나와 함께 분유를 퍼먹으며 신나게 깔깔 웃었던 그 순간만이 남아 여전히 달콤하고 고소한 맛으로만 기억하거나 차라리 그 날을 새하얗게 잊었길 바랐다.

나의 옛 친구가 부디 분유같은 포근한 것에서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으면 한다.

언니가 아니었다면 그 부드럽고 달콤한 즐거움을 평생 알지 못한 채 살았을 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