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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헌 Sep 18. 2023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끝엔 자살이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포르쉐 몰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싶다.

카메라가 오리 무리에 낀 백조를 비춘다. 관람자의 눈동자가 빛나고 백조는 날개를 펼친다. 나는 백조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몇 주간 내가 느낀 감정은 백조 무리의 오리인걸. 날개가 있으니 날아가는 것, 날아가는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날개가 달린 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굳이 보여줬지만 나는 날개만 있고 날지 못하는 새였나.


재화의 결핍은 늘 후회를 부른다. 어떤 형태의 결손은 균등함을 깨뜨리고 공포로 인한 뒷걸음질조차 허락되지 않게.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손바닥만 한 땅 위에 나를 밀어놓고 우스운 듯 비웃는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는 것은 내 목뼈였다. 거울로 다가가 머리 위에 도대체 뭐가 올려져 있는지 볼 겨를도 없이 부러진 목을 가진 인간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나는 쓰러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어정쩡한 영역 속에서 나는 서지도 눕지도 못한 상태로 서서히 숨이 멎게 되겠다.


처음이 언제였던가? 아마 열셋. 당시에는 초등학교 도서실 대여카드가 색종이 위에 반, 이름 등을 프린트한 후 증명사진을 놓고 코팅해 놓은 형식이었다.

이전 학기에 나와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몇 반일까. 뒤적뒤적 찾아보다가 건네어 받은 말이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른 성숙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알기 때문에 상처 입고 이미 알았기에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열다섯 쯤. 나는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지 혹은 자연스러운 사회의 급류 속에서 불가항력적인 것인지 구분해야 했다. 그러나 사춘기 소년이 어른들조차 분분한 그런 소재를 적확히 판단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래가 뭐라고, 유행이나 아이콘이 뭐라고. 하지만 이미 설계된 성장의 단계와 과정은 이제는 나에게는 하찮아진 저런 것들을 절대로 하찮은 것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행했던 말이나 행동들에는 미숙함이 있었고 오히려 이번엔 성숙에 상처 입은 과거와는 다르게 나의 미숙함이 타인을 깊게 찔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을 세상은 과실치사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르더라. 나는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도리어 꼬인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 싶을 때는 확실한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해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이 생겨버렸다.


 알아버린 열일곱. 어울리지 않는 것을 손에 쥐려고 하면 탈이 난다. 10  일이고, 나는  일이기에 여부를 냉정히 판단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너는, 혹은 나와 비슷한 너희들이 하는 고민은 누군가는 평생동안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라. 앞으로의 삶에서 단단해져서  더는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을 보내 과거에 놓았다. 향에 불을 붙혀 함께 꽂아놓았다.

그때의 말랑한 나에게 교육받은 성숙함이나 당당함으로 상처 입힌 이들은 지금은 내 기억 속에 마치 유령처럼 떠다닌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과의 친밀함이 트리거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깨지더라도  조각이 크다.

하지만 나는 파편을 가지려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열아홉에 나는 알았네, 이해시킬  없다면 포기할 줄도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사랑만으로, 마음만으로 움직일  있는 것은 세상엔 정말 적거나 없다는 것을.


스물여덟이 되었음에도 훼손된 가치는 복귀되지 않았으며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열셋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여전히 나의 시야에 위치한 황금은 늘 유의미한 격차를 만들고 금을 밟고 올라선 사람들은 그러지 않겠노라 언젠가 했던 다짐을 잊고 아래 있는 이들을 깔아보았다.


최근에 접한 소식과 미디어는 내가 밟고 있는 학문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런 사람이 세상이 아름답지 않게 보일리가, 보통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나 아기들이나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는 세상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말하기 조심스럽다. 누군가에겐 나도 꽃밭에서 사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리고 그 미장센은 내가 구성한 것이 아니었나. 없는 살림 끌어모아서 산 것은 질투였으니까. 전환율이 떨어지는 에너지라서 나의 즐거움은 월급날 전후에만 있었다.


왜 안 즐거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하고 묻는다면 그 역시도 함구가 나의 대답이다.

내 머리 안에는 산과 바다가 있는데 각각의 지역에서 자란 아이들은 도무지 서로의 생활양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나의 함구는 그 아이들에 대한 설명이자 보호이다.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원망스럽지만 사도들이 그를 부정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이유로 나는 단 맛을 부정하지는 않으리.


근본적인 즐거움이 2년 안에 있으리라는 근거는 전혀 없는 믿음이 있다. 배신당해도 어쩔 수 없는 신뢰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내가 믿는 어른 중 한 사람은 나에게 다음 단계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렇다. 어른과 성숙한 인간의 사고방식이란 그런 것이다. 고양이가 식탁 위로 올라오면 물컵을 치우는 것. 주차된 잠긴 차 안에 아이와 강아지를 남겨두지 않는 것.

아마 나를 입자가속기에 탈탈 돌려서 분해해 보면 핑계나 그럴싸한 이유라는 성분이 분명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멘탈을 열심히 담금질하고 제련했다는 말도 취소다. 정말 그랬다면 이럴 리 없지. 악착같이 굴고 당장의 갈등과 결핍을 채운 것들이 거시적인 나의 삶에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악착으로서 모았던 그것들은 오늘의 나를 변질시켰다.


진짜 성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23살의 난 사랑을 부르짖으며 동시에 바지런히 움직여 사랑을 벌어 잔고를 채웠다. 26살. 불과 2년 전이지만 정말, 정말 정말 아득한 시간들.

사람이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인어도 아닌데 바다에 살았다.

그렇게 부유하던 내가 해류 따라 닿은 곳이 낙원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발을 구르고 손을 내저어 방향을 틀거나 사방으로 나아간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라앉지 않으려는 노력은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물에 뜨는 법은 알고 있었다. 필연적인 거 말고 정말 떠있는 법은 알았다.


없는 게 많았다. 백지가 주어지면 뭐라도 써야 그것이 나의 수필이 되고 일기가 되고 스테이트먼트가 되는 것이었다.

돈도 실력도 열정도. 내가 가졌던 얄팍한 총량은 몇 자 쓰지도 못하고 펜촉이 부러지고 잉크가 말라버리게 했다.

세상엔 재화가 많으니 훔치던 빌리던,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하더라도 내가 슬피 우는 이유는 이제는 재화의 결핍에 있지는 않다. 결핍의 구덩이는 내가 가진 작은 삽과 적은 용량의 포대로 아주아주 긴 시간을 들여서 다시 채웠고 그 안에 있던 후회들도 웬만하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머리를 깼다.

나에게 세상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이가 아니라 늘 설득하고 회유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비스무리한 것이라도 얻어내야 하는 말 안 듣는 클라이언트에 가까웠기에 늘 불편함이 함께했다.


불안정한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나.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나 같아도 진절머리 날 것만 같다. 금일 나를 울게 한 것은 뭐였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 닿은 장소에는 난도질당한 자존심이 있었다.

기쁨을 노래하고 밝은 감동을 전하는 제작자가 되기는 글렀다는 게 기쁨을 지향하고 소망하지 않는데도 나를 조금은 울적하게 했다. 틀린 문제의 맞는 답을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이제는 맞는 문제의 맞는 답의 채점도 부정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낙관하는 사람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말들, 잘 될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포기하지 마! 방법이 생길 거야! 참 싫다. 되긴 어떻게 되며 방법은 어디서 뿅 하고 생길까. 끼니를 때우고 등이 따스우면 되는 너희들이 난 밉고 싫다.

더 나은 상태를 지향하는 나였지만  늘 서랍 안쪽까지 샅샅이 뒤져서 가지고 있는 재료를 주욱 늘어놓고 이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음식은 이거로군!이라고 판단되고 나면 착수해야 했다. 맛이 있었을까? 풍미를 느꼈을까? 그것은 음미하려고 만든 음식이 아닌데 그럴 리 만무하지 않겠나. 정말 아름다운 맛을 보고 싶다. 내가 이 감각을 느끼고 재현하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고 행하고 싶다. 애석하게도 실현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고통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이미 재료를 꺼내기도 전에, 옛 전쟁으로 따지면 쾅! 붙어보기도 전에 이미 졌다. 저들은 싸우지 않고도 나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팬 후 바닥에 고꾸라뜨린 것이다. 와, 정말 세네.라는 인정의 생각보다 단전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화의 방향은 스스로를 향하고 이전에 그랬듯이 나는 또 철거되는 것이다.

그래 그냥 차라리 굶어 죽지. 추한 모습으로 허물어지고 누군가 벽돌을 빼가고 철골을 잘라다가 고물상에 팔아 흉물스러운 모습의 폐허가 될 바에 정말 기둥뿌리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건물로써의 용도자체가 폐기되는 상태로 나아가야지. 그래서 스스로 죽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예론 교수의 수많은 말 중 가장 뇌리에 남은 말이 속삭였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또 다른 책의 구절이 전언을 보내왔다. 보잘것없는 사람일수록 대단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꿈꾼대!


환불은 1주일 내에 영수증이랑 결제했던 카드를 지참해야 할 수 있다. 이건 어린애도 안다. 근데 나는 태어난 지 27년쯤. 환불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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